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조선)/평가 (문단 편집) == [[대한민국]]의 평가 == [[14세기]] 말, 사방팔방에서 위기에 처한 [[고려]] 말기에 [[전국]] 각지의 반란군과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원나라]] 황제가 보낸 군대, [[나하추]] 같은 멸망한 원나라의 [[군벌]], 남쪽에서 패악질을 부렸던 대규모의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 북쪽의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당대 [[동아시아]] 최대의 혼란기 속에 고려를 지탱한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주자였으며 마지막에는 자국인 고려마저 [[멸망]]시켜 버림으로써[* 사실 원나라도 이성계가 원나라의 재침공을 막아낸 게 멸망의 원인들 중 하나로 작용했으므로 이성계는 사실상 원나라도 자기가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당대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들과 싸워서 이긴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 점에서는 최영과도 비슷한데 최영은 고려만 빼고 나머지 세력들과 전부 싸워서 이겼으며 이성계의 출현 전까지 모든 적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했다.] 물론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으로 대변되는 그의 행보는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은 [[최영]], [[정몽주]]와 대비되어 까이기도 하고 말년의 우유부단함과 때로는 냉혹해 보이는 몇 가지 사례들, [[왕씨 몰살]][* <[[연려실기술]]> 같은 [[조선]] 후기 [[야사(역사)|야사]] 기록을 현대의 [[인터넷]] 매체들이 몇 배나 자극적으로 양념을 치고 퍼날라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매우 멀어졌다.가령 왕씨가 수십만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과연 이게 연려실기술에 근거한 내용인지는 의문이다.일단 당대 인구를 감안해 보면 설득력이 없다.] 등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한다. 이성계의 집안은 고려 -> 원 -> 고려로 이어지는 배신을 저지른 주제에 백성과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요했다고 조롱 받는 것은 덤. 나아가 조선은 끝내 [[한일병합|외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추태를 부리며 망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반감이 이성계에게 전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태조 본인이 보여준 군사적 역량과 행동력, 측근 관리와 비범한 일화 등 개인 차원의 [[영웅]]적 면모 뿐만 아니라 시대적 관점에서 볼 때 홍건적, 왜구, 원나라 세력 등 빈발하는 외침 속에서 최영과 더불어 반평생에 걸쳐 수많은 [[전투]]를 통해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켜낸 [[위인]]이라는 점에서 [[국가]]와 [[민족]]에 대한 그의 헌신과 업적은 폄하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치력을 빼면 나라를 개창할 만한 역량은 넘치게 갖췄다는 평. 역성혁명에 대해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유혈과 희생, 고려에 대한 충정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각이 일정 부분 정당성이 있는 부분이지만 어쨌거나 당시 고려가 체제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바이기에 고려를 붕괴시키고 [[정도전]] 등 개혁파의 의견을 대폭 수용하여 새로운 체제의 [[나라]]를 건국한 것은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가 분명히 적지 않다고 평가된다. 무엇보다 그 아들인 태종과 손자인 세종이 한국사를 통틀어서 손꼽히는 먼치킨들이다보니 이성계의 과오들은 '''극복하지 못한 한계''' 정도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다만 최근 학계에선 당시 권력교체라고 여겨지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고 조선이 고려와 이어진다는 조선중세설이 이미 다수설이 된 점, 새로운 개혁인 과전법이 왕조 교체 전에 이미 시작된 점 등을 종합했을 때 태종과 세종의 치세라는 결과를 모르는 당시 상황에서는 많은 피를 불러일으키며 왕조교체를 한 점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