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조선)/생애 (문단 편집) ==== 기타 가설과 신덕왕후의 사망 ==== 일각에서는 이성계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몽골, 여진족 등 북방 유목 민족에서는 큰 아들부터 재산의 일정 지분을 주고 차례로 독립시키고 막내가 끝까지 본가에 남아 부모를 모시다 부모님 사후 나머지 재산을 상속 받아 본가의 후계자가 되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목초지 고갈 문제 때문에 항상 새로운 초지로 이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장성한 아들들은 빨리빨리 독립시켜 스스로 새로운 지역에서 목초지를 개척하면서 살도록 하는 생존 전략이다.] 동북면에서 성장한 태조가 그 지역의 여진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의 풍속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태조가 세자로 책봉하려던 아들은 막내가 아닌 방번이었고, [[배극렴]], 정도전 등의 간언을 받아들여 결정을 바꿨기 때문에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치적 이유 등으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을 배제한 후, 신덕왕후의 [[장남]]인 방번을 먼저 염두에 뒀다는 점에서 말자상속의 원칙으로 후계자를 세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번이 누구의 사위인지 생각하면 고려 왕실의 피가 왕통에 섞으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게 아니라면 처음에 방번을 고려했다는 기록이 왜곡일 가능성도 있다. 승정원 일기가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을 대조해보면 실록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왜곡과 짜깁기가 심한 사료다. 조선 전기 승정원 일기가 남아있지 않아 선택지가 없어서 선뜻 다른 의견 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더불어 태조는 다시 고려인으로 귀부하기 위하여 유목 민족에 영향을 받은 풍습을 완전히 끊어버린 인물인데 느닷없이 왕위 계승 문제에 유목민 풍습을 끌어들이는 것은 뜬금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반발속에서 1396년 6월 세자 이방석의 생모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뒷배가 부실해졌다. 태조는 세자 이방석의 권위를 위해 일부러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서울 성북)|정릉]]을 한양 도성 내, 그것도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빈으로 책봉하고 세자 이방석과 현빈 심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태종이 뒷날 정릉을 파버리고 석물을 [[청계천]]에 처박은 것도 아버지의 정치적 고려를 다 헤아리고 맞대응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 대권이 일부 종친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반대파 입장에선 세자와 왕손이 장성하고 기반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거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주게 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종친, 구 세력들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