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고려) (문단 편집) == 개요 == >'''"태조 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요하(遼河)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환영]를 통일하셨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고려사]] 열전, 최승로》 > '''짐도 역시 단지 평범한 데서 시작하여 착오가 있었는 지 추대를 받아,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근심으로 몸을 애태운 지 19년[* 이건 햇수이고 918년 7월-936년 9월이므로 18년이 맞다. 아래의 25년은 918년 7월-943년 7월 초이므로 거의 일치.] 만에 삼한을 통일했다. 외람되게도 큰 보물을 차지한 지 25년이 되니 몸은 이미 늙었도다. 다만 후손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릴까 두렵구나. 이에 「훈요」를 지어 후대에 전하노니 아침에 펼쳐서 저녁까지 두루 보아 길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 ---- > <[[훈요 10조]]> 머리말 [[고려]]를 건국한 [[고려왕조]]의 [[창업군주]]이며 수많은 [[호족]]들이 난립하던 신라 말의 난세를 평정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한 고려의 초대 [[대왕]]이자 [[천자|해동천자]]이다. [[고구려|고구려 유민]] 출신[* 과거 [[낙랑군]]과 [[대방군]] 일대를 아우렀던 [[고구려]] 말기의 핵심 배후지이자 수도권이었던 [[패서]] 출신의 고구려 유민이다. 고구려의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였던 한성(漢城, 현 [[황해도]] [[재령군]])이 있었으며, 멸망 직후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검모잠]]과 [[안승]]을 필두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유력한 귀족 성씨였던 왕씨는 [[고구려]]가 [[미천왕]] 대에 이르러 통치하게 된 [[낙랑군]]과 [[대방군]]을 비롯해 [[평안도|관서]] 및 [[황해도|해서]] 일대를 기반으로 두었던 가문이다.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개성 왕씨|왕건의 선대]]는 [[고구려]]의 [[귀족|대족(大族)]]이었다고 전해진다. 김관의가 저술한 편년통록보다 더 정확하고 합리적이라 추측되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한 [[이제현]]에 따르면 왕건의 선대는 이전부터 왕씨 성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으로, 준수한 용병술[* 해상 [[호족]] 출신으로서 [[수군]]을 운용함이 능숙하였다. 이는 [[나주 공방전]]에서도 빛을 발한다.]과 뛰어난 용인술을 바탕으로 좌우 신하들과 사방의 세력가들을 노련하게 휘어잡은 [[성군]]이며 숙명의 [[라이벌]]이자 당대의 [[명장]]으로 이름났던 [[견훤]][* [[고대 그리스]]의 [[피로스 1세]],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행적이 비슷한 명장이자 국왕이었다. [[대야성 전투]]를 기점으로 [[후백제]]가 [[서라벌]]로 진격함으로써 신라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공산 전투]]에서 [[고려]]의 수뇌부 일동을 다수 전사시킴으로써 상당의 호족들을 회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견훤 본인의 역량 덕분이었다.]을 제압하고 삼한일통을 이룩한 [[최후의 승자]]다. 한국사 군주들 중 손에 꼽을만한 너그러운 임금이었다.[* [[후백제]] 멸망 이후 백제인들에게 일절 해가 없도록 명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로써 [[견훤]]을 몰아냈던 [[신검]]도 용서했다. 더 나아가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발해유민]]들을 수용하고 나라를 들고 항복한 [[경순왕]]과 신라 지배층을 수용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건국 이후 사후 처리에 있어서 피비린내가 뒤따르던 고대와 중세의 왕조들과는 상반되는 행보를 보여준 덕분에 고려는 발해, 후백제, 신라의 지배층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집단을 수용했으면서도 그들의 지지를 고루 받아 재위기간을 무탈히 보낸 것을 보면 정치력 역시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9번 혼인한 왕으로도 유명하지만, 즉위 당시의 나이가 41세... 그러나 그것은 전부 혼인정책으로 인한 정략혼이며 어쩔 수 없는 결혼이였다. 조선의 태조와 비교하면 전술은 아래지만 정치는 위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게 일종의 동아시아 트렌드인지, 왕건 사후 얼마 안가 중화권을 통일했던 [[태조(송)|송태조]] 역시 이런 쪽으로는 대인배로 유명했다. 반대로 고려왕씨들을 탄압한 조선의 경우 당시 옆나라 명나라도 [[주원장]]이 미쳐날뛰며 숙청의 바람이 불던 시절이였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사의 [[통일|통일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이다.[* 다만 신라는 직후에 [[발해]]가 다시 생겨서 남북국시대가 되긴 한다.] 일각에서는 신라 통일의 불완전성을 문제 삼아 고려가 한반도의 첫 통일 왕조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려 역시 신라가 놓쳤던 당시 [[발해]]의 전 영역을 완전하게 통합하지는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신라가 통일한 영역 안에서 나뉘었던 땅을 재통일한 후 북방의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삼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통일의 개념을 '한반도'의 통일로 상정한다면 신라의 통일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서는 신라와 고려 양국의 통일 의식이 그 통합의 대상을 두고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부터 확실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국가 단위에 가장 근접한 집단의식인 삼한일통의식은 13세기 초까지 삼국유민의식의 분립성과 공존하였다. 또한 [[발해유민]]이나 탐라의 포함 여부를 놓고, 고려 건국을 주도한 고구려 유민 계열과 신라 유민 계열의 두 갈래 삼한일통의식이 경쟁했다··· 고려의 국가 단위 집단의식에 해당하는 삼한일통(三韓一統) 의식이 적어도 크게 두 가지 계열이 병존하며, 경쟁하고 있었던 것 역시 종래에 알려지지 않은 한국 민족 형성사의 이해에 중요한 역사상이다. 고구려 유민 계열과 신라 유민 계열의 삼한일통 의식은 그 안에 만주의 발해 유민과 남쪽의 탐라국(제주도)을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큰 차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자료들을 통해 검토되고 있다." 〈고려국가와 집단의식·자위공동체·삼국유민·삼한일통·해동천자의 천하>-노명호, 출판사 서평]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 >《남당서 권18, 고려》 고구려 유민 계열(패서 호족)이 주축이 되어 삼한은 물론 발해 및 여진과 탐라까지 적극적으로 포용했던 고려와 달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조차 완전히 녹여내지는 못했으므로 지리적 통일은 성공했을지라도 민족적 융화에 실패했다. 따라서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은 [[발해유민|발해 지배 계층과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여진·탐라 등 다양한 종족을 흡수하여 개방적인 세계관을 지향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후손이란 집단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던 초기 고려인들은 북진 정책을 활발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대제국 [[요나라|거란]]과의 26년에 걸친 치열한 [[여요전쟁|전쟁]]까지 감수하는가 하면, 대규모의 원정군을 일으켜 [[여진족|여진]]이 부분적으로 점유하던 [[고려의 여진 정벌|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실질적 노력]]을 상당히 기울였다.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고려의 [[요동 정벌|고토 회복 시도]]는 이어졌다. 따라서 고구려 시대와 달리 중세시대에 들어 유례없이 강대해진 북방 민족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밀어붙일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거란의 경우 발해를 힘으로 만주에서 축출해버릴 정도였다.] 고려가 신라와 같이 한반도 남부에 국한된 삼한통일을 꾀했다는 식의 해석은 오류이다. 고려의 삼한통일은 신라의 삼한통일과 달리 고구려 시절의 판도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확고했음에도 여건 상 한계에 봉착한 것에 가깝다.[* 고려 후기에도 [[요동 정벌]]을 꾀한 바 있으나 항목에도 있듯 보급 문제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불만 등 여러 이유로 좌절된다.] 즉 한반도 남부의 해양무역 루트 지배에 주력하던 신라 왕조의 성향과 달리 만주와 요동을 고토로 여기는 성향은 고려의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왕건과 고려 건국세력의 직계 조상이었던 고구려가, 최초로 삼한을 통일했던 신라와 대등한 수준의 메인 스트림으로 한국사에 자리잡는데 있어 고려 왕조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백제 지못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