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상황 (문단 편집) === 한국 ===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동생 혹은 장남인 [[차대왕]]에게 양위하고 별궁에서 기거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태조대왕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다소 논란이 있다). 100세를 훌쩍 넘겨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 [[수명]]을 비롯한 정황에서 상식적으로 [[삼국사기]]보다 중국 [[후한서]]의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이는데, 후한서의 경우는 태조왕이 죽고 나서 차대왕이 즉위한 것으로 쓰고 있다. [[신라]]는 [[진성여왕]]이 [[효공왕]]에게 양위하고 반 년 동안 태상왕으로 있었던 적이 있다. [[고려]]는 [[헌종(고려)|헌종]] · [[명종(고려)|명종]] · [[신종(고려)|신종]] · [[희종(고려)|희종]] · [[원종(고려)|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8명의 사례가 있는데 [[무신정권]]과 뒤이은 [[원 간섭기]]를 겪으면서 그 수가 대폭 늘었다. 헌종은 작은아버지 [[숙종(고려)|계림공]]에게 옥좌를 반 강제로 양위하고 전왕(前王)으로 불렸다. 명종은 [[최충헌]]에 의해 옥좌에서 끌려 내려 왔는데 [[동문선]]에 기록된 명종 애책문엔 명종이 태상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신종은 태자 희종에게 스스로 선위하였다. 희종은 최충헌을 죽이려 했다가 실패하고 명종처럼 선위라는 명목하에 폐위당했지만 일단 태상왕의 칭호와 대접은 받았다. 원종은 [[임연]]에게 협박당해 태상왕으로 밀려나 용암궁에 유폐되었다가 원나라의 압력으로 임연이 한 발 물러서면서 겨우 복위했다. 원 간섭기에 재위한 충렬왕, 충숙왕은 아들에게 양위했다가 복위했고, 충선왕은 두 번째 재위기[* 첫 번째 재위기는 양위가 아니라 원나라에 의한 폐위였다. 충선왕이 [[조비(고려)|조비]]를 총애하는 것에 불같이 투기한 [[계국대장공주]]가 원나라 조정에 이걸 일러바쳐 즉위 8개월 만에 원나라로 강제 소환됐었다.]에 아들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눌러앉은 사례라 국왕 재위 순서가 좀 꼬여있다.([[원종(고려)|원종]]→ [[충렬왕]]→ [[충선왕]]→ 다시 충렬왕→ 다시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다시 충숙왕→ 다시 충혜왕→ [[충목왕]]) 조선에선 [[태조(조선)|태조]] · [[정종(조선)|정종]] · [[태종(조선)|태종]]이 살아서 왕위를 물려줬다([[세조(조선)|세조]], [[중종(조선)|중종]]도 그랬지만 딱 하루 뒤 사망하여 예외. 또 [[연산군]]하고 [[광해군]]도 예외. 그리고 또 [[단종(조선)|단종]]의 경우도 예외. 상왕으로 있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고 사후 복권되었기 때문이다.) 태종 재위 기간에 태조와 정종이 공존했고, [[세종(조선)|세종]] 치세엔 정종과 태종이 공존했다. 태조는 상왕으로 2년·태상왕으로 8년을, 정종은 상왕으로 18년·태상왕으로 1년을[* 그러나 태상왕이 아닌 노상왕으로 불렸다.], 태종은 상왕으로 3년·태상왕으로 1년을[* 이쪽은 아들인 세종에 의해 격상되었다.] 보냈다.[* 정종의 기록은 한국사에서 가장 긴 기록이다.] 정종이 사망할 때까지 신하들은 일상적으로 정종을 '노상왕'으로, 태종을 '상왕'으로 칭했으며, 정종이 사망한 뒤인 1421년 태종을 성덕신공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높이기도 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여 상왕이 됨에 따라 조정 신료들은 당연히 상왕인 정종 이방과를 태상왕으로 부를 것을 주청하였지만, 왕이 된 세종은 태종보다 나이가 더 많으시니 노상왕(老上王)이라 부르면 충분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 이듬해 정종이 사망하자, 세종은 아버지 태종을 태상왕으로 격을 올렸다. 원래 상왕과 그 선임자가 함께 공존할 때 태상왕이 되는 것이었지만, 세종은 아버지의 격을 (정종보다) 높여드리기 위해 이같이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단 상왕이 되려면 후임왕에게 [[선위]]를 해야 가능한데 조선 전기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이런 경우가 나왔지만 이후 유교적 덕목인 충효가 강화되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왕이 살아있는데 선위를 받는 것 자체가 불충이고 불효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래서 몇몇 임금들은 이른바 '선위 파동'을 일으켜 세자 및 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본인의 권위에 대한 재신임을 받아 정당성을 확보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선조(조선)|선조]]와 [[영조]]. 따라서 세자와 신료들은 선위를 그냥 넙죽 받아들이면 반역이니 [[석고대죄]]하고 선위를 거두어 달라고 빌어야 했다. 그렇다고 선위의 뜻이 정말 확고하면 그걸 지나치게 거부하는 것도 불충이라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