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극기 (문단 편집) ==== 태극기의 제작 과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 국기(조미수호통상조약 이응준 태극기).sv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 어기.svg|width=100%]]}}} || || 최초의 태극기인 이응준 태극기 || 조선국왕의 어기[* 깃대 방향이 오른쪽으로 타 국기들과 반대인데, 동양과 서양이 글 읽는 방향이 반대였듯 깃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표현된 팔괘는 [[주문왕]]이 정리했다고 전해지는 후천팔괘이며, 조선군 좌독기에도 마찬가지로 후천팔괘가 들어가 있다.] ||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조인식에서 역관 '''[[이응준(역관)|이응준]]'''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본래 조선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국가적 상징으로서의 국기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국기 제정 문제를 두고 논의하였으나 계속하여 도안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또 배마다 반드시 국기를 달아야 하는데 '''국기는 지극히 귀중한 물건'''으로서 갑국(甲國)의 배가 을국(乙國)의 국기를 도용(盜用)한 경우 해적(海賊)과 동일하게 보아 을국의 군함이 잡아 징벌할 것입니다. >---- >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1876년) 2월 3일 을축 1번째기사 중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의 수록(手錄) 발췌 그러던 [[1882년]] [[5월 14일]], 미국 공사 로버트 슈펠트는 [[5월 22일]] 있을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을 앞두고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지정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통리기무아문]]의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그리게 하였다. 이게 최초의 사용례인 속칭 '이응준 태극기'[[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00205003117&subctg1=&subctg2=/|#]]이다. [[2004년]] 미국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1882년 [[7월 19일]] 미국 해군부(Navy Department) 항해국이 제작한 서류 중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에 지금의 태극기에서 태극 모양이 약간 다를 뿐 전체적으로 매우 흡사한 태극기 도안이 첨부되어 있는 것이 나타났으며, 2018년에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앞서 발견된 태극기보다 두 달 빠른, 조약 당시(1882년 5월)의 도안도 발견되었다.[[https://news.v.daum.net/v/20180814030554151|#]] 사실 태극기를 누가 먼저 고안했느냐 하는 논쟁은 1880년대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논쟁이다. 1882년 10월 2일자 도쿄 일간신문인 《시사신보》(時事新報) 제179호에 따르면 당시 [[이홍장]]에 의해 조선에 파견되어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을 도왔던 마건충(馬建忠; ''마젠중''[* /Ma Jianzhong/][* 묄렌도르프와 함께 파견된 청나라측 고문 마건상(馬建常; ''마젠창'')으로 오기한 사례가 있는데, 별개의 인물이다. 마건상은 대외적으로 '상백(相伯)'이라는 자를 써서 활동했다.])이 약 한 달 전 '청나라 국기'를 모방한 국기를 제안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조선에 국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를 청국의 국기를 모방하여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서 쓰도록 한데 대하여 고종이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거절하면서,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도를 적색, 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괘를 붙여서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 [[청나라]]는 당시 청 황실의 깃발로 사용하던 삼각형 황룡기를 변형하여 조선에 "속국의 모습을 보이라."라고 제안하였는데,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명령이었다. 이 과정에서 황색 바탕을 백색 바탕으로 바꾸고 청색 용은 붉은 용으로 바꾸며 청색 구름도 추가하여 백저청운홍룡기를 만들어 쓰라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다루었다. 동양의 오방색에서 황색은 중앙을, 청색은 동쪽을 의미한다. 또한 청룡은 동쪽을 관장하는 신수이니, [[청나라]]가 황룡기를 사용하고 조선이 청룡기를 사용하라는 의미는 곧 변방에 있는 신하의 예를 갖추라는 말을 의미했다. 또한 조선의 용은 격식을 낮추어 발톱이 하나 적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청나라의 이런 일방적인 명령을 분개해하여 거부하였으며,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마건충이 '청국의 국기를 모방한 것'뿐만 아니라 '태극 [[팔괘]]도' 또한 제안했으며, 따라서 태극기의 도안자는 마건충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청국문답(淸國問答)》에 수록된 마건충과 김홍집 간의 필담이 제시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ata26/2007/9/22/189/npe7_ysu1016.jpg|width=100%]]}}} || || 마건충이 주장한 형태의 태극기와 흡사한 태극팔괘도 || >'''마건충''' "국기문제는 중대사안이므로 돌아가서 정부 당로자와 세밀히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 일전에 이 문제[* 마건충은 조선측의 국기 도안을 본 후, 1882년 4월 6일에 일본 국기와 혼동되므로 하얀 바탕에 푸른 구름과 붉은 용을 그린 깃발을 국기로 채택할 것을 건의하였음]를 논의한 후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흰 바탕 중앙에 태극도를 그리고 그 주위에 팔괘를 두른다면 조선 8도의 수와 합치되고 있다. 8괘의 색깔은 완전 흑색으로 하여 드러나게 하고, 태극의 색깔은 반홍반흑으로 하며, 깃발 가장자리에는 홍색선을 두른다면 어떻겠는가. 단, 이같은 견해는 본인의 사견이다. 마땅히 우리 정부에 보고할 것이다. > >'''김홍집''' "귀하의 가르침을 받들겠다. 우리 조정에 이 문제를 보고해서 알리겠다." >---- >1882년 4월 11일 당시 마건충과 김홍집이 나눈 필담 내용 중[* 『구한국외교문서』권10, p.14, 「南館別時問答 十一日」] 여기서 역사적 해석이 갈리는데, 위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전제하고 절충하자면 상기한 필담 내용에서 '태극팔괘도'를 언급한 것은 4월 11일, 슈펠트의 요청 및 국기 제작일이 5월 14일로 알려져 있는 만큼, 발상 자체는 마건충이 제안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현대 중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채택해 "태극기의 제작자는 중국의 외교관 마건충이다."라고 못박고 내부적으로 그것을 교육/선전한다.[* [[영어 위키백과]]에서 역시 수가 더 많은 중국 편집자들의 일방적인 수정으로 태극기의 실질적인 제작자를 마건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영어 위키백과는 영향력과 별개로 어디까지나 일반인도 수정이 가능한 사이트이기에 중국인의 위키백과 왜곡이 곧 국제적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건충이 김홍집과의 필담에서 조선 국기의 형태를 제안했다고 알려진 1882년 4월 11일은 음력 날짜로, 양력 날짜로는 5월 27일에 해당한다.[* 이태진 「대한제국의 황제정과 민국 정치이념 -국기의 제작ㆍ보급을 중심으로-」, 『한국문화』22호, 239쪽, 1998] 그 이전 시점인 5월 22일(양력)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시에 태극기가 사용되었으므로, '''마건충의 제안 이전에도 이미 태극기의 도안은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마건충이 태극기의 형태를 제안했다고 볼 수 없다. 태극기 사용이 이미 진행된 상황에서 마건충이 태극기의 도안을 제안하는 투로 발언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청나라의 영향력 하에서 태극기가 도안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김원모「조미조약 체결 연구」,『동양학』22권 1호, 59~67쪽, 1992]였다는 의견과, 홍룡기 사용을 관철하지 못한 자신의 체면치레를 위해 이미 도안된 태극기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 것에 불과[* 이태진 「대한제국의 황제정과 민국 정치이념 -국기의 제작ㆍ보급을 중심으로-」, 『한국문화』22호, 239~240쪽, 1998]하다는 의견이 있다. 아울러 고종이 직접 태극기 제작에 관여한 구체적인 기록도 박영효의 일기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고종은 군주를 상징하는 붉은색, 신하를 상징하는 파란색, 백성을 상징하는 흰색 등의 색 배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김홍집]]은 그 도안이 [[일장기]]와 비슷함을 지적하면서, 주변에 조선 8도를 상징하는 팔괘를 추가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여기에 영국인 선장이 괘가 8개나 있으면 너무 그리기 어렵고 번잡하니 4괘로 단순화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고, 마침내 도안이 확정되었다. || [[파일:external/e6e58e2674e95486e30202ffb0479809675b147b68b1244692b3526a7b20396a.jpg|width=60%]] || [[파일:조선군 좌독기.svg|width=100%]] || || 주돈이의 태극도[* 곤도성녀(坤道成女)의 한자 표기가 坤道坤道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 조선군의 좌독기 || 물론 고종의 개인적인 식견으로 없던 도안을 창조해낸 것은 아니다. [[태극]] 자체는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것이 [[6세기]] 백제 때일만큼 오래 된 문양이었으며, [[유교]] 이전에도 아시아 각국에서 영험한 문장으로 쓰이다가 [[송나라]] 대 유학자인 [[주돈이]]가 태극도를 만들어 [[주자(철학자)|주희]] 이후 [[성리학]]적 이론의 바탕으로 흡수되었다. 조선 왕실의 상징이었던 어기 역시 태극도에서 유래한 기본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임진왜란 이전부터 사용했던 [[조선군]]의 좌독기도 테두리에 둘러싸인 낙서(洛書)[* 중국 하나라의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 강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씌어 있었다는 마흔다섯개의 점으로 된 아홉 개의 무늬. 팔괘의 원형이다. 여기에는 가운데 있어야할 십자모양의 무늬가 태극으로 인해 생략되어있다. ]를 제외하고 보면 어기와 모양이 똑같다. 좌독기는 명나라에서 도입된 것으로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창안한 디자인은 아니나,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팔괘]]로 둘러싸인 태극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모양이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