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권도/올림픽 (문단 편집) === 타 무술단체들의 견제 === 초창기 태권도는 후발주자였던 만큼 당연히 해외에서 세력이 [[가라테]]나 [[쿵후]] 계열 중국 무술보다 약했으며 80년대까지 올림픽 차기 종목으로 유력한 것은 가라테였다. 그러나 각 분파가 나뉜 가라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교섭할 가라테 전체를 대표하는 단체가 없었다. 그에 반해 태권도는 1978년 9대관 통합을 하는 등 단일화의 길을 걸었다. 또 세계 단체도 [[세계태권도연맹|WT]]와 [[ITF]] 두 거대 단체로 양분되었지만 통일되어 있었다. 특히 WT가 국가적 지원을 받는 [[국기원]]에 의해 관리받기에 좀 더 공신력이 있어보였을 뿐더러 스포츠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던 요소 등도 뒷받침되었다. 당시 [[김운용]] IOC 위원의 정치적 협상력도 큰 몫을 했다.[* 다만 미국 태권도의 대부 [[이준구(태권도)|이준구]] 관장은 비리 스캔들로 태권도 명예를 망친 자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올림픽에 목 메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가라데 유파나 중국무술 단체들 중에는 올림픽에 '전혀' 관심 없는 곳들도 많다. 올림픽에 나가려면 스포츠화가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이로 인해 수련 체계가 바뀌어야 하고, 더불어 IOC의 입김에 단체가 영향을 받는가 하면, 정치적으로도 연결이 되는 골치아픈 일들이 산더미처럼 생기기 때문. 그러느니 자기들 유파의 순수성이나 무도이론을 계속 지키고 싶어하는 곳들도 많다. 태권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태권도계의 통합에 큰 잡음이 없었던 건 사실 역사성이 짧은 한계 덕분(?)도 있지만, [[최홍희]]의 망명 이후 70년대 군사정권의 반강제적인 통합 정책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으로, 태권도를 국기로 키우기 위해 국가권력을 통해 힘으로 밀어붙인 단면이 단일화의 요인 중 하나였다.[* 다만 WT의 기본적인 골격은 60년대에 이미 갖춰지고 있었다. WT 품새도 타협의 결과로 가라데와 ITF 태권도를 참고하여 1967년 만들어졌다.] 사족으로 [[우슈]]도 [[중국공산당]]에서 통합 시도를 한 적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너무나 많은 우슈 분파들이 존재하다보니 반발이 하도 심해 포기한 바 있었다.[* 태권도야 어차피 도장만 다르지 같은 무술을 하는 만큼 통합을 하기도 쉬웠겠지만 우슈는 말이 좋아 우슈지 유파 자체가 전혀 다른 데다가 그 넓은 중국 땅에 흩어져 있는 만큼 공통점이 없어서 넘어야 할 산이 태권도에 비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가라테도 우슈만큼은 아니지만 꽤 갈라진 편이고. 당장 송도관 중심의 전통 가라테와 극진회관 중심의 실전 가라테로 나뉘어져 있다.] 반면, 한국은 태권도를 사실상 하나의 조직으로 단일화하는 데 성공했고, 50년대 초창기 시절부터 이뤄진 장기간의 적극적인 홍보와 전파로 세계 전역에 많은 경기, 수련 인구를 쌓게 된다. 그리고 신생 독립국으로서 [[국격]] 향상을 위해서 국제적 이벤트에 목을 메게 되었다. 태권도는 [[유도]]가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올림픽 종목인 된 것을 [[벤치마킹]]하여 스포츠화하면서 올림픽 종목 진입을 목표로 하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정식종목 진입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시범종목이 됐으나 이러한 급격한 성장은 가라테, 우슈, 북한 및 ITF의 견제를 받게 된다.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측은 경악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시안게임에서 태권도가 종목에서 제외되고 대신 [[우슈]]가 정식 종목으로 진입했기 때문. 한국측의 강력한 항의와 1994년 IOC에서 태권도를 2000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결정하면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종목에 재진입하지만 가라테도 이때 아시안 게임 종목에 진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