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권도/역사 (문단 편집) ==== 지도관(조선연무관 권법부) ==== 1946년 3월 3일 전상섭이 열었으며, 최초 이름은 '조선연무관(朝鮮硏武館)' 권법부(공수도부)였다. 전상섭은 일본에서 후나고시 기친에게 쇼토칸 [[가라테]]를 배웠고, YMCA 권법부의 윤병인과 친하여 같이 중국 권법을 수련하러 [[만주]]에 가기도 하였다.그러던 중 6.25를 겪으며 전상섭이 [[행방불명]]되었다. 전상섭의 뒤를 이어 윤쾌병이 조선연무관 관장이 되었다. 윤쾌병은 일본 [[주오대학]]에서 병리학을 전공했으며, 유학 중 도야마 간켄(遠山寬賢)의 슈토칸(修道館)에서 가라테를 배웠다. 1945년에는 일본 도쿄에 한무관(韓武館)을 세워 관장으로 활동하다 전상섭의 영입으로 조선연무관 권법부에 부임했다. 참고로 한무관은 현재 사단법인 전일본공수도연맹 렌부카이[鍊武會]로 이어지고 있다. 윤쾌병이 귀국했던 1949년 말 당시 그는 가라테 7단이었다고 한다. [[https://mookas.com/news/17833|지도관의 전신 '조선연무관 권법부']]. 윤쾌병은 6.25 당시 부산에 피난해 있던 [[이종우]]와 의기투합하여 단체명을 지도관(智道館)으로 개명했다. [[http://worldtaekwondojidokwan.com/www/wt_1_1|지도관연맹 역사]]. 서울로 돌아오자 1954년 이종우를 지도사범으로 영입했고, 지도관은 이 둘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여담으로 윤쾌병은 1950년부터 [[서울대]] 수의과 [[교수]]를 역임했고 이어 [[건국대]] 축산대 교수로 부임하여 건국대 축산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인터넷에서 윤쾌병을 검색하면 주로 [[한국야쿠르트]] 명예회장이 검색되는데, 동일인물이다. 윤쾌병은 --말많은-- 친척인 윤덕병 창업자와 함께 1969년 일본 야쿠르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한국야쿠르트사를 창업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종우는 5대관장 이후 등장한 2세대 태권도인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그는 1946년 3월 23일 조선연무관 공수도부(권법부)에 입관해 가라테를 접한 이후 대한공수도연맹을 결성해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대 초 슨도메 방식을 채택하고 있던 전통가라테와 다른 겨루기 도입을 이끌기도 했다.[* 이건 스포츠 문화가 있던 택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다른 무술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만.] 1960년대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태권도계가 통합을 이루고[* 다만 이종우는 이때 대한태수도협회를 고집해서 최홍희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실제 이종우는 본인이 배운 가라테에 대한 자부심이 있던 인물이었고, 훗날 태권도가 가라테가 기반이 된 무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체계화할 때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협회장 직책은 선배들이나 정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기술위원장 등에 재직하며 실질적인 부분을 많이 맡았는데, 이 기간 동안 태권도의 품새를 제정하고[* 다만 안티들에겐 품새가 가라테 가타 그대로 베겨쓴 수준이라고 욕도 먹는다.(...)] 국기원 등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시대 흐름에 따른 관의 통합, 전자호구 도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