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현조 (문단 편집) == 생애 == [[가정제|가정]] 29년 음력 8월 14일에 [[장시 성]] 무주(撫州)시 임천(臨川)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몸이 병약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총명하여 다양한 스승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그 중에는 [[양명학]] 태주(泰州)학파의 진보적 학풍을 전수받은 나여방(羅汝芳)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이는 탕현조의 작품에 깃든 진보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세에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8년 후인 1570년([[융경제|융경]] 4년), 21세의 나이로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1571년(융경 5년), 1574년([[만력제|만력]] 2년)의 [[진사#s-1.2|진사시]]에서 연달아 낙방했고, 1577년에 다시 진사시에 응시했다. 하지만 당시 내각 수보였던 [[장거정]]이 자기 아들을 급제시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을 모아 부정 시험을 계획하였고, 계획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하여 그 해 시험은 물론이고 3년 후인 1580년의 진사시에까지 낙방하고 말았다.[* 한편 그와 친분이 있었던 한 [[심(성씨)|심(沈)씨]] 선비는 1577년부터 장거정의 계획에 참여하여 1갑 1등으로 장원급제했고(...), 이때 장거정의 둘째 아들이 1갑 2등으로 급제했다. 1580년엔 장거정의 삼남과 장남이 각각 1갑 1등, 2갑 13등으로 급제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공부한 끝에 1583년(만력 11년) 34세의 나이로 3갑 211등으로 급제한다. 그의 첫 벼슬은 [[난징]]의 태상시박사(太常侍博士, 정7품)라는 예악, 제사 관련 부서였다. 난징은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가 주관하는 제사를 드릴 일이 거의 없었고 탕현조는 이 때 독서와 유람, 그리고 저술에 몰두한다. 그러나 장거정의 제안을 거부할 때부터 떡잎을 보였던 그의 강직한 성품 탓에 인사과 관리로부터 미움을 사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1588년(만력 16년)과 1589년(만력 17년)에 두 차례나 부서를 옮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탕현조는 1590년 달관(達觀)선사를 만나 수계를 받고, 당시 성리학을 반대하였던 이지(李贄, 1527~1602)의 사상에 동의하며 오히려 자신의 개혁적 가치관을 더욱 공고히 했다. 1591년(만력 19년) [[윤년|윤삼월]]에 [[혜성]]이 관찰되자 황제가 이를 신하들의 태만과 불충으로 인한 흉조라고 여겼다. 이에 탕현조가 전국 방방곡곡의 감찰사들과 조정 대신들의 과오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상소를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실세 대신들이 반박 상소를 꾸준히 하여 도리어 자신이 [[광둥성]] 서문(徐聞)현의 말단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현재는 개발되어 제법 부유한 지역이지만 예전엔 변방인데다 해안 지역이라 농사도 잘 안 되는 미개척지였다.] 사실상 유배였던 것이다.[* 그는 서문현으로 가는 도중 [[광저우]], [[마카오]]를 방문하여 서양 문물을 접하고 [[마테오 리치]]를 만나가도 하였다.] 그러다가 1593년(만력 21년) [[저장성]] 수창(遂昌)현 지현으로 발령받아 거기에서 선정을 베풀었으나, 역시나 그 강직한 성품 탓에 한 수창현 출신 관료의 은닉 토지를 처분하여 그로부터 모함을 받아 1598년(만력 26년) 조정에 사직을 청하고 귀향하였다. 3년 후에 사직서가 처리되어 정식으로 면직된 탕현조는 소설 창작에 전념하다가 1616년 음력 6월 16일에 고향에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