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평책 (문단 편집) === [[이인좌의 난]] 이후의 영조 시기 === 한편 이인좌의 난이 실패한 이후에 이로 인해 소론이 크게 타격을 입고, 노론이 재집권하며, 옥사와 같은 짓을 우려한 영조는 탕평에 대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다. 1729년에 영조는 기유처분을 하면서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고루 등용하는 정책을 편다. 영조는 기유처분을 전후해서 왕권 강화를 위해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는 '''완론 탕평'''을 천명했는데, 노론에는 홍치중(洪致中, 1667 ~ 1732)과 김재로(金在魯, 1682 ~ 1759)가, 소론에는 송인명(宋寅明, 1689 ~ 1746), [[조현명]]과 같은 완론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갔다. 성균관에는 이러한 자신의 탕평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탕평비를 세웠다. 탕평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周]][[而]][[不]][[比]](주이불비)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 >[[乃]][[君]][[子]][[之]][[公]][[心]](내군자지공심) >군자의 마음이요 > >比而不周(비이불주)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 >[[寔]][[小]][[人]]之[[私]][[意]](식소인지사의)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내용은 예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먼저 영조가 처음 생각했던 탕평책은 '''쌍거호대'''이다. 노론, 소론의 융화를 권면하고, 이에 순응하지 않으면 축출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온건파를 기용하고, 강경파에 대해서는 준노의 영수이자 정미환국으로 권력에서 소외된 민진원과 준소의 영수이자 노론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던 [[이광좌]]를 불러 화합을 도모했으며, 이에 순응하지 않는 [[이병태]], [[유척기]] 등을 파직했다. 그러나 강경파를 다스리기는 너무 힘들었고 점점 '''유재시용'''의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유재시용이란 탕평파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이다. 영조의 지원 아래,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않는 탕평파의 독주가 이어졌지만 이후에 시파가 독주한 [[세도정치]] 시절과 달리 당파색이 남아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여전했다. 이러한 대립은 신축옥사와 임인옥사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영조의 왕세제 시절 역모 혐의를 벗는 것과 관련이 된 중대한 사안이다. 영조는 탕평파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안정되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가장 먼저 해결을 한게 1729년 기유처분이다. 여기서 영조는 신축년 사건과 관련해서 충도 역도 아니다란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1741년에는 대훈을 통해 신축년의 일은 왕실에 대한 정당한 일이라 했고, 임인년의 일은 조작된 것이라 기록을 삭제한다고 하였다. 즉 영조 자신에게 씌어진 역적의 누명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이다. 다만 소론 측의 입장에서 보면 정국이 노론으로 기울어지고 노론에 의한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에 소론 탕평파의 영수였던 [[조현명]]이 이른바 '가짜 시' 사건을 만들어서 노론 5인에 대한 역은 그대로 인정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이를 통해 노론은 경종에 대한 불충을 따질 근거가 사라졌으나 이후에도 영조는 완노와 완소가 중심인 탕평파를 통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한편 탕평파를 중심으로 한 탕평 정국은 영조가 승하하는 1776년까지 이어갔지만, 점차적으로 소론 탕평파인 완소가 불리해 졌다. 위에서 경종에 대한 불충여부를 따질 수 있는 임인옥사의 기록이 파기된지라 철저하게 영조를 기준으로 충역을 따지게 되었고 이는 경종에 대한 충역도 강조하던 소론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노론 탕평파인 완노는 연잉군을 위해 직접 경종을 몰아내는 역모에는 가담한 적은 없지만 연잉군을 지지했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완소와 같이 탕평 정국을 이끌면서 자신의 세력 안에 있었던 강경파를 밀어냈다. 반면에 완소는 [[신임옥사]] 시절에는 준소와 같이 경종을 지지하다가 승하 후에 준소와 손절하고 영조에 대해서 인정하며 탕평 정국을 위해 완노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명분 상으로는 완노에 비해 불리했다. 그러다가 1755년에 [[나주 괘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오랫동안 정권에서 밀려났던 준소가 대거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으며, 이 때 노론에 의해 소론 5대신에 대한 처벌문제가 나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대훈을 수정해서 노론 4대신은 충신, 소론 5대신은 역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게 되었다. 즉 노론이 승리를 거두게 된 셈이다.[* 정확히는 영조를 세제 시절부터 지지하면서 영조의 완론 탕평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탕평당이 된 완노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 수정작업에는 완소도 적극 참여하면서 그들의 입지도 강화가 되었다. 또한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까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입지가 불리해진 소론을 노론이 철저하게 없애려고 했던 것을 막으면서 탕평의 근거를 남겨놓았다. 문제는 이 직후에 등장한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이었다. 세자를 보호해주던 [[인원왕후]]와 [[정성왕후]]가 1757년 모두 죽게 되었다[* 정성왕후가 1757년 2월, 인원왕후가 한 달 뒤인 3월에 훙서했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완충제 역할을 하던 두 사람이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사망한 것.]. 세손의 영특함과 세자의 정실질환이 맞물리면서 벌어진 것이 1762년의 [[임오화변]]이다. 홍봉한은 특히 이 과정에서 '일물'(뒤주)를 통해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하였다. 이후 영조는 남은 세손을 지킨다는 것을 분명히 했으나, 이 과정에서 세손의 외숙인 [[홍봉한]]의 세력을 키워주게 되었고, 정순왕후의 친가인 경주 김씨 세력이 대항마가 되면서 척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이 펼쳐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정국에서 세손을 돕느냐 아니냐에 따라 [[홍봉한]]-[[홍인한]] 형제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김귀주]] 남매끼리도 입장이 갈리게 되는 등 그야말로 오히려 더 왕권을 둘러싼 극심한 대립구조를 보이게 되었다. 이후 [[홍봉한]]과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청명당]] 둘 다 쫓겨나게 되자 그 사이를 홍인한과 [[정후겸]]이 차지하면서 권세를 쥐는 등 결국 영조 말년의 탕평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보는게 맞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편, 이 탕평 때문에 의외의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는데, 자세한 것은 [[유소(상소)]] 문서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