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평책 (문단 편집) === 병신처분 이후부터 이인좌의 난까지 === 그러다가 숙종의 탕평은 변수가 생겼는데 바로 후계 문제였다. 숙종은 [[희빈 장씨]]가 사사된 직후부터 훗날 [[경종(조선)|경종]]이 되는 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숙종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았던 세자를 대신해 다른 왕자를 후계자로 삼는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자를 교체하고 다른 왕자를 세자로 삼는 것은 당연히 신하들은 목숨걸고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자를 교체하는 구상은 잠시 미뤄졌다. 그러다가 1716년에 [[병신처분]]이 터지고 탕평이 깨졌으며 노론을 중심으로한 [[김창집]]이 권신이 되자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숙종은 그러자 세자를 교체하는 구상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에 노론이 숙종의 희망사항에 은근히 영합해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권하고 은근슬쩍 세자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아무리 왕의 뜻이라지만 일국의 후계 구도와 상속의 법도를 흔들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노론은 비록 폐비되었지만 전 중전 [[장희빈]]의 친아들인 세자를 폐위하고 후궁 소생인 연잉군을 후계자로 세우는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소론이 찬성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고, 대리청정 기간에 세자는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자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대리청정을 통한 폐위 작전은 막히게 되었으며 숙종도 1720년에 승하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경종 때는 경종 본인의 몸도 아프고 권위도 약했고 정권을 잡은 노론이 공공연히 경종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탕평책을 펼칠 수 없었다. 뚜렷하게 탕평책을 하고자 하는 의지나 행적도 없었는데, 경종 때 노론 중에서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칼만 안 들었지, 역적질 하고 다니는 상황이었고 소론은 경종에게 의지하면서 겨우 버티는 상황이었다. 탕평책을 하면 특히 노론 중에서 준노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소론에게 순순히 지분을 넘겨줄리도 없었고 소론에게 노론과 싸우지 말라고 하는 건 소론이나 자신이나 그냥 정치 포기하겠다는거나 진배없었다. 경종은 우선 왕실마저 위협했던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준노를 꺾어야 했고 붕당간 중재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 경종은 후에 탕평책을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한다. 1721년에 [[신축환국]]이 벌어졌을때 김창집이 중심인 준노에서 준소와 완소가 합친 소론으로 정권을 바꿀 때 준노를 반드시 죽여야 했으며,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준노가 한 짓거리를 보면 죽일 이유는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1722년에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한 삼수의 옥에서 경종에 대한 암살 시도가 명백했으며, 이 때 준노의 영수였던 김창집이 사사되었고 그에 동조했던 [[이이명]], [[이건명(조선)|이건명]], [[조태채]]가 사사되었다. 그리고 행동대장이었던 [[민진원]]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노론은 후계자 선정, 대리 청정으로 약점이 있었지만 경종은 노론 중에서 준노가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후 소론 강경파와 손 잡고 노론을 제거했지만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민진원을 비롯한 준노를 제거한 것이며, 준노 일당이 경종에 대한 암살 시도가 연잉군이 공개적으로 인정할 만큼 분명했기 때문에 명분 상 매우 충분했다. 준노 같은 경우야 대리 청정과 독살 시도를 하는 역모를 보아 다 멸문당해도 할말 없는 죄였으며 반면에 준노를 제외한 다른 노론 인물들은 죄를 씌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건을 덮어두었다. 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정권 교체로 피를 흘렸으나 준노가 오랫 전부터 대리청정을 통한 폐위 기도, 독살로 통한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가 명확한 상황에서 주범이 었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민진원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연잉군을 위해서라지만 연잉군도 인정한 만큼 역모가 있었으니 소론도 나름 이유가 있었고 노론도 준노의 영수인 김창집과 수하인 이이명, 이건명, 민진원 등 제거하는 선에서 마무리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타협을 이루게 된다.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자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했고, [[신축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노론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되는데 영조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즉위 직후, 경종이 노론(준노)의 실각과 소론의 집권을 위해 일으켰던 임인옥사의 책임을 물으면서 사건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국문을 통해 신임옥사의 고변자인 [[목호룡]], 노론 사대신을 몰아낸 [[김일경]]을 처형했으며, 준소 일당들을 몰아냈다. 또한 노론 사대신을 신원하고 준노 중에서 살아남은 [[정호]], [[민진원]]을 삼정승에 제수했다. 한편 소론 온건파도 몰아내서 대신인 [[조태구]]와 [[최석항]]의 관작을 추탈하고 좌의정인 [[유봉휘]]를 유배했다. 1725년에 일어난 사건을 이를 을사처분이라고 한다.[* 을사처분 당시에 제주도로 귀양을 간 윤지는 약 20년 후에 노론을 몰아내고자 어떠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나주 괘서 사건'''이다.] 이와 같은 영조의 결정이 있었지만 준노는 만족하지 않았고, 소론의 생존자들을 처형하길 연일 주청했다. 그러나 노론 강경파인 준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론과 소론 탕평파 대신들을 기용하고, 파직되거나 삭탈관직된 소론파 신하를 복직시키고 신원하는 등 소론의 편을 들어주었다. 영조는 1727년에 노론 강경파인 준노를 다시 몰아내고 노론 온건파인 완노를 관직에 제수하면서 [[정미환국]]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도 역시 탕평이라는 정책의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정미환국으로 소론 탕평파인 완소가 집권하자 정권에서 밀려나고 있었던 소론 강경파인 준소가 격분하여 [[경종 독살설]]을 기반으로 해서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은 연잉군(영조)가 경종을 게장과 생감 혹은 인삼과 부자를 먹여 죽였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이것은 오히려 스스로 반란자임을 선포한 셈이고 과거에 그들이 신임옥사 시절에 노론의 역모를 진압했던 명분마저 잃게 되면서 결국에는 실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