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사오이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파일:output (1).jpg]]|| || 미국 시절의 어린 탕사오이(오른쪽)컬러사진 || [[광둥성|광동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매사추세츠]] 주에서 초등학교를 [[코네티컷]]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영국령 홍콩]]에서 [[빅토리아 대학교]]를 거쳐, 1874년 청나라 3차 미국 유학생에 선발되어 [[컬럼비아 대학교]]에 진학, 1881년 귀국하였다가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의 수행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였을 때 총을 듣고 묄렌도르프의 집 앞을 경호하여 위안스카이의 눈에 들게 되었으며 1885년, 위안스카이의 서기관에 임명되었다. 1889년 주용산상무위원, 주조선한성영사에 임명되었으며 1895년 주조선총영사가 되었다. 1891년 위안스카이가 모친상을 만나 귀국하자 위안스카이의 직무를 대리하여 조선의 청군을 지휘하였다. 1892년 5월 10일 장례를 마친 위안스카이가 조선으로 돌아오자 권한을 돌려주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와병한 위안스카이를 대신하여 사무를 처리했고 [[이홍장]]에게 전보를 쳐서 위안스카이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청나라의 입장에서 대단한 치욕이니 위안스카이의 귀국을 청했고 이홍장도 이에 동의했지만 청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탕사오이는 자신을 발탁해준 위안스카이에게 보답하기 위해 이홍장에게 다시 전보를 보냈다. ||위안스카이 대관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 열이 몹시 높고 왼쪽 팔과 다리가 아파 견디지 못할 지경입니다. 조선의 정세가 위급하고 의약도 부족하여 한성에서는 고칠 가망이 없습니다. 이 모습에 신은 가슴이 타는 듯 합니다. 조선의 일은 위안스카이 대관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귀국하면 조정 가까이에서 대신들과 의논할 수 있어 전쟁을 벌이든 화친을 하든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이를 그냥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면 애석한 일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감명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7월 18일 위안스카이는 모든 업무를 탕사오이에게 인계한 이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탕사오이도 1898년 부친상을 당함에 따라 10년이나 되는 조선 생활을 마무리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인도 제국]]에 파견되어 중영장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교관의 업무를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