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탑골공원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원각사 터.png|width=100%]]}}} || || {{{#000 ''' 탑골공원 조성 전 모습. 원각사지 십층석탑(왼쪽)과[br]대원각사비(오른쪽) 바로 앞까지 민가가 들어서 있다. '''}}} || 원래는 [[절(불교)|사찰]]이 있었던 자리였다. [[고려]]왕조 때에는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조선]]왕조 때에는 [[세조(조선)|세조]]가 건립한 [[원각사]](圓覺寺)가 있던 자리였다. 그런데 조선 10대 임금이자 [[폭군]]이었던 [[연산군]]이 원각사를 없앴고,[* 그 이유는 자신이 놀 [[기생]]방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11대 임금인 [[중종(조선)|중종]] 때 건물을 철거했다. 한동안은 [[원각사지 십층석탑]] 만 빼고 공터로 남았고 주변에는 민가가 들어섰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원각사지 십층석탑 옛모습.jpg|width=100%]]}}} || || {{{#000 ''' 대한제국 시기 갓 조성한 탑골공원 모습 '''}}} || 1897년([[광무]] 1년)에 한성부 판윤 이채연이[* 주미조선대사 출신 친미개화파로, 한성부 판윤 자리에 오른 이후 한성개조사업을 통해 한성부 가로망과 도시공간을 정비했으며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해 한성에 [[서울전차|전차]]를 도입했다.] [[영국인]] 고문 브라운과 함께 이곳을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공원이 되었고,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기 때문에 '동양의 불탑'이라는 뜻의 '파고다'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파고다공원 음악당과 원각사지 십층석탑.jpg|width=100%]]}}} || || {{{#000 ''' 일제강점기 탑골공원. 석탑과 양식 음악당이 보인다.[*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New/NR_archiveView.do|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일제]]가 솟을삼문식 남문을 부수고 돌로 만든 대문을 세웠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만세운동 참가자들이 운집하여 만세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팔각정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으로 역사에 남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59년 3.1절 탑골 공원 기념식.jpg|width=100%]]}}} || || {{{#000 '''1959년 삼일절 기념식'''}}}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16.egloos.com/f0020275_4b002cb180049.jpg|width=100%]]}}} || || {{{#000 '''1960년 4월,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 [[1960년]] [[4.19 혁명]] 때도 이 공원은 큰 의미를 지녔다. 탑골공원은 당시에도 서울 도심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일만한 유일한 공원이었는데, 하필 이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동상이 있었다. 4.19 당시 이 공원은 시민들이 모여 시위를 벌이던 곳이기도 했는데, 시위가 극에 달했던 1960년 4월 26일 오전 9시 45분께 분노한 시민들이 공원 안으로 들어가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려 쳐부수게 된다. 그리고 동상이 철거된 직후인 오전 10시 2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선언을 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시, 이 곳의 인분을 가져다가 사용하기도 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탑골공원_정문.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울_탑골공원_-_삼일문.jpg|width=100%]]}}} || || {{{#000 ''' 옛 탑골공원 정문. 현재 서울대학교 동숭캠퍼스에 있다.[*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3989896&ccbaKdcd=31&ccbaAsno=0068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000 ''' 현재 탑골공원 정문인 삼일문[*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974&ccbaKdcd=13&ccbaAsno=035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탑골공원은 1967년부터 대대적으로 모습이 훼손된다. 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억 3,000만원이라는 초대형 민간자본을 투입해 광장의 테두리를 둥글게 두르는 대형 [[아케이드]]를 건설하고 공원 입장료까지 받았다. 이와 더불어 서양식 석조 대문은 1969년 [[동숭동]]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기증되어[*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있지만 사적 지정 전의 일이라 기록이 미비해 실제 교문 위치는 아직도 알 수 없으며, 동숭동 시절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출신들 사이에서도 교문이 [[방송통신대학교]] 쪽으로 나있다고도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443|주장했다.]]] 교문으로 쓰이기도 했고,[* 1975년 동숭동 캠퍼스가 관악으로 이전한 뒤에도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 교문으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 1972년 삼성건축이 [[강릉 임영관 삼문|강릉 객사문]]을 모방해 삼일문을 새로 만들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68-06-18)낙원상가 공사현장.jpg|width=100%]]}}} || || {{{#000 ''' 파고다 아케이드(오른쪽)[* [[https://opengov.seoul.go.kr/sites/default/files/editor/(1968-06-18)%EB%82%99%EC%9B%90%EC%83%81%EA%B0%80%20%EA%B3%B5%EC%82%AC%ED%98%84%EC%9E%A5.jpg|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br]신축 공사 중인 낙원상가의 모습이 정면에 보인다. '''}}} || 건설 당시 [[국토교통부|건설부]]가 아케이드 상가 건설을 반대했다고 하지만, 정부의 고집으로[* [[박정희]] 정부는 집권 이후 [[3.1 운동]]과 [[4.19 혁명]]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렸고, [[삼일절]]의 위상도 낮췄다. 그렇기에 파고다 아케이드를 건설한 것도 3.1 운동과 4.19 혁명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을 말살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있다는 역사학계 일부의 지적이 있었다.] 아케이드가 지어졌다.[* 아케이드 건축 과정에서 공원 경내 남쪽에 있던 [[서울특별시교육청종로도서관]]이 쫓겨나 현재의 [[사직공원(서울)|사직공원]]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2층짜리 상가로 지어진 이 건물은 파고다 아케이드라고 불렸고, 소공동 반도조선아케이드(현 [[스타벅스]] 환구단점), 공평동 신신백화점(현 [[SC제일은행]] 본점 터)과 더불어 서울의 3대 쇼핑 아케이드로 인기를 끌었다. 이때 파고다 아케이드에는 악기상, 양장점 등이 있었고, 당시의 생활 수준에서 볼 때 고급으로 분류되는 기호물품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파고다 아케이드는 줄곧 "독립운동 사적지인 탑골공원을 훼손하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시민의 지적을 받았고, 결국 1977년 [[서울특별시청]]이 아케이드 상인들을 상대로 관리권 명도이전 소송을 걸어 5년 간의 법정 공방 끝에 서울특별시청이 승소했다. 그리고 [[전두환 정부]]가 들어선 후인 1982년 파고다 아케이드 철거 방침이 내려져 1983년 하반기에 철거했다. 공교롭게도 파고다 아케이드가 철거되면서 공원 바로 북쪽에 있는 [[낙원상가]]가 악기상의 메카로 자리잡았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파고다 아케이드의 철거로 인해 이 상가에 입주하던 악기상들이 줄줄이 낙원상가로 이주한 결과, 낙원상가가 악기 도소매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파고다 아케이드의 건설과 철거 등이 담긴 [[2018년]] [[8월 15일]]자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886539|기사]]를 읽어보자. 동 신문사의 다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886512|기사]]도 참고할 만하다. [[1988년]] 5월 [[서울특별시]]에서 무료공원으로 개방했으며, [[1991년]] [[10월 11일]]에 정식 명칭을 '탑골공원'으로 개칭했고 [[2011년]] [[7월 28일]]에 '서울 탑골공원'으로 재변경했다. [[1990년대]] 이후 [[종묘]] 공원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노인들의 쉼터가 되었다. 그래서 공원 주변에는 노인들을 손님으로 하는 오래된 상가가 많다. 그러나 무료급식 등으로 [[노숙자]]가 몰려들고 일부 노인들이 술판을 벌이는 등 [[고성방가]]를 일삼으면서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속칭 '[[박카스 할머니|박카스 아줌마]]'라고 불리우는 노인 전문의 중년 [[성매매]] 여성들까지 득실거렸다. 결국 [[2001년]]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으로 탑골공원의 정비로 일부 설비 철거 및 무료급식소 이전, 고성방가 단속으로 노인 이용객이 하루 수십명 수준으로 격감했다. [[풍선효과]]로 [[2009년]]경 노인 인구가 대다수 종묘광장 공원으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1996261|인구이동]]이 일어났으나, 이후 [[2007년]]부터 시작한 종묘 광장 성역화 사업으로 이곳의 노인 이용자 수 역시 격감하는 추세이다. [[2021년]] 제102주년 [[3·1절]] 경축 행사가 탑골공원 팔각정 앞에서 거행되었다. [[https://youtu.be/umch4oEtw2M|경축식 전체 영상]] 평년에는 [[국가보훈처]] 주최로 [[민족대표 33인]] 및 [[3.1운동]] 희생선열 추도식이 거행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