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탑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인도 스투파.jpg|width=600]] 스투파의 발전 과정 [[파일:external/www.bbstour.com/89763.jpg|width=600]] 대표적인 [[인도]]의 불탑인 산치 대탑 중 제 1탑.[[http://www.bbstour.com/web/inform/default3/inform_list.asp?menu_id=69752&id=17181|*]] [[파일:스투파 허톈.jpg|width=600]]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림 분지]]의 [[허톈]] (호탄)에 위치한 라와크 스투파 유적 탑은 [[석가모니]]가 사망한 뒤 그 [[사리(불교)|사리]]를 담은 기념물에서 출발하였다. 초창기 인도 불교 신자들은 석가모니를 기억하고 신심을 북돋고자 사리를 담은 탑을 자주 찾았다. [[석가모니]]가 사망한 뒤 다비할 적에, 그 사리를 받고자 인근 8개 왕국이 사람을 보내어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이때 한 바라문이 나서서 중재하고 사리를 8등분하여 각 나라에 전해주었고, 사리를 받은 나라/부족은 각자 기념물을 세워 기념했다. 8개 나라/부족이 받았으므로 당연히 사리탑도 모두 8기라 '근본8탑'이라고 부른다. 석가모니가 사망하고 수백 년이 지나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에 귀의하면서 탑을 여럿 만들고자 했다. 아쇼카 왕은 근본8탑 중 단 한 기만 제외하고 나머지 7기의 내부에 모신 사리를 꺼내어 덜어낸 뒤, 인도의 각 지방으로 보내어 불사리탑을 짓도록 명령했다. 불교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아쇼카 왕이 인도 전역에 불사리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고 하는데, 불교에서 '8만 4천'이란 숫자는 '극히 많음'을 가리키는 상투적인 표현이므로 정말로 8만 4천 기는 아닐 것이다. 이후 아쇼카 왕이 퍼트린 불탑의 사리가 다시 이전되고 하면서 여러 가지 탑이 나타났다. 대체로 네모난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봉분에 해당하는 둥근 구조물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우산 모양 상륜부를 얹은, 당시 인도의 무덤 형태인 스투파(stūpa, 솔도파, 率堵波)를 따랐다. 이렇게 탑은 본래 [[부처]]의 무덤이므로 당연히 사리가 들어가야 하지만, 당연히 부처의 진신사리는 그 수가 한정적이라 불교가 퍼져나가면서 진신사리 대신 [[경전]] 및 작은 [[불상]] 혹은 [[보석]]과 같은 상징물을 법신사리라 부르고 탑 속에 넣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은 따로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지칭하는데 [[통도사]]가 대표적이다. 이런 구조는 탑이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인도 초창기 불교에서 유래한 토탑(土塔) 혹은 적석탑(積石塔)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과 일본 등지에도 극소수 남아있다. 이후 중국의 목조건축양식 혹은 [[벽돌]] 건축양식과 만나 둥근 구조물과 상륜부는 축소되어 탑의 지붕 위에 장식처럼 얹히게 되었다. 이건 지금의 한국 사찰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는데 탑위의 장식물을 보면 아주 조그마한 둥그런 밥사발을 뒤집어놓은 모양의 장식을 볼 수 있다. 그게 인도 탑의 우산 모양 상륜부의 영향이다! 이후 중국의 벽돌 [[전탑]] 양식이 다시 [[목탑]] 양식, 그리고 동아시아식 [[석탑]] 양식으로 분화한다. 중국에서 벽돌 [[전탑]]으로 재정립된 양식이 다시 한반도로 전해져 [[황룡사]], [[미륵사]]에는 [[목탑]]이 만들어진다. 한편 한국에서는 벽돌로 만들 흙보다 돌이 더 풍부했기 때문에 전탑 그 자체보다는 [[분황사]]처럼 전탑을 본뜬 [[모전석탑]]이 만들어지고, 백제 지역에서는 목탑의 영향이 남아있는 석탑이 만들어진다. 이후 이들 양식이 혼합되어 한국 고유의 석탑양식이 만들어졌고, 이 과정에서 인도불탑과 유사한 형태의 토탑/적석탑은 주류에서 사라지고 동아시아에 맞게 변한 탑을 본따 조그맣게 흙으로 빚어 불탑 안에 넣는 공예품을 토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륵사의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이며, 통일신라 때에는 3층 석탑이 보편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감은사]]지 석탑이나 [[불국사]]의 [[석가탑]]. 통일신라식 석탑은 한반도 전역에 퍼져나가 [[경주시]]부터 [[황해도]], [[금강산]]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의 석탑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런 석탑양식은 [[고려]]까지 이어지고 고려 중기 이후 원의 영향으로 [[경천사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십층석탑|원각사탑]]이 만들어졌다. [[일본]]으로 전파된 탑은 목조건축이 발달한 일본에 맞게 목탑이 주류가 되었다. [[파일:external/www.cha.go.kr/1640974.jpg|width=500]] 고려시대 세워진 의성 석탑리 방단형적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1호.([[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3010000,37|사진출처:문화재청]]) 안동에도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31,03430000,37|안동 석탑리 방단형적석탑]]이 존재한다. 여기는 의성과 비교해 근처에 석탑사라는 작은 절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어 그나마 상태가 좀 낫다. [[파일:external/homepage2.nifty.com/01.jpg]] 일본 소재 토탑의 모습([[http://homepage2.nifty.com/K-Ohno/a-map/Osaka/3745-DD-historic%20sites/03-DD.htm|사진출처]]/[[https://translate.googleusercontent.com/translate_c?act=url&depth=1&hl=ko&ie=UTF8&prev=_t&rurl=translate.google.com&sl=auto&tl=ko&u=https://ja.wikipedia.org/wiki/%25E5%259C%259F%25E5%25A1%2594&usg=ALkJrhjtM-Q369bIiTmgCfq6tXeaR7DnOQ|일본위키링크]]). 다만 이는 후대에 복원된 것이며, 이 복원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도 [[http://yamashirokihachi.blogspot.kr/2013/11/blog-post_3.html|정확한 복원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