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탐라 (문단 편집) === [[삼국시대]] === 탐라국이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기 이전에, 《[[후한서]]》 <동이열전>과 《[[정사 삼국지|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주호국]]이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마한]] 서쪽 바다 큰 섬의 세력이라는데, 한반도 부속 도서 중에는 제주도가 가장 크므로 이들이 고대에 탐라를 지배한 세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 추정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탐라가 한반도 국가와 직접적으로 통교한 것은 백제의 웅진 남하 시기 이후로 추정된다.[* 정확히는 제주도에서 중국계 유물도 발견되는 만큼 이미 [[한사군]]대의 교역망에도 들어가 있었고 따라서 침미다례와 같은 남방 국가들과 교류가 먼저 있었을 건 당연하긴 한데 기록이 제대로 남을 정도로 본격적인 중앙집권 왕국과 통교한 건 이때가 최초이다.] [[근초고왕]] 대의 남방정벌 기사를 과거에는 [[침미다례]]를 제주 탐라로 규정하여 제주도까지 소급 적용했던 바 있으나 이후 침미다례와 같은 마한계 후기 국가의 소재를 전남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백제 문화권이 전남으로 내려오는 것은 웅진백제기 이후이고,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서도 백제의 전남, 제주 등의 남방 진출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 이후로 해석할 수 있다.(다만, 이는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의 공물 납입 및 복속 기록, 《일본서기》의 복속 기록, 《수서》 <백제전>의 백제 부용국인 '탐모라(耽牟羅)'[* 남북 1,000여 리, 동서 수백 리에 항해에 3달이 걸린다는 기록 때문에 섬의 크기나 생김새, 거리상 제주도가 아니라 지금의 [[대만 섬]]이라는 떡밥이 있으나, 군선이 대만으로 표류했다면 굳이 백제를 들러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또한 대만은 《수서》에 함께 기록된 유구국(流求國)이라는 설이 있다(다만 유구국에 대해서는 [[류큐]]설이 조금 더 우세하긴 하다.). 물론 가장 기본적으로 백제가 제주도 또한 완전히 영토로 편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만까지 원정을 나가는 뻘짓을 왜 했느냐, 그리고 했다면 관련 기록은 왜 없느냐는 비판 또한 들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수나라가 바다 동쪽의 여러 섬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로 보인다.] 기록 등을 종합해 볼때 일반적으로 시기의 오차가 조금 있기는 해도 [[동성왕]]대를 전후하여 500년 무렵에 전남 해안 지역과 탐라까지의 편입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중론이다.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년). 한국 사서 중 탐라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단이다.[* 다만 이 문단에서의 탐라국은 아래 기록의 '''처음으로'''라는 말 때문에 전남 지역에 존재하는 마한의 잔존 세력으로 파악하려는 의견도 있다.] ---- >南海中耽羅人 初通百濟國 >2년 (508년) 겨울 12월 : 남해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교통하였다, >---- >《일본서기》 권17 <[[케이타이 덴노|계체기]]> ----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 (중략) …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진(육조)|진]]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위덕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중략) 그(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리이다. 토산물로 [[노루]],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 >《수서》 <백제전>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의 아홉 나라(九韓, 구한)에도 '''탁라'''(托羅)가 들어간다. 이외의 8국은 [[일본|왜]](倭), [[중화(중국)|중화]](中華), [[오월]](吳越),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말갈]], 단국(丹國, [[거란]]), 여적(女狄, [[여진족]])[* 의외로 [[여진족]]의 존재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기록에 나온다. 흔히 [[퉁구스]]계 민족들의 계보를 '[[물길]]-[[말갈]]-여진-[[만주족|만주]]'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확히는 퉁구스계 제민족들을 통일한 부족의 이름이 종족명이 된 경우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즉, 말갈족이 득세할 때도 여진족이 있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말갈족에게 끽소리도 못하고 눌려지내던 [[겉절이]]였다는 뜻이다.], [[예]][[맥]](濊貊, 고구려로 보임)이다. '구한'(九韓)이라고는 하여 [[삼한]]을 비롯한 주변의 대동소이한 민족들을 열거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k_0041_0070_0040_0010_0010#self|탐라국이 연마 등을 보내 옴]].]을 참조했을 때 백제가 복속한 이후 백제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며,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k_0040_0080_0040_0020#self|'왕자'의 존재]]도 확인된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 [[백제]]의 [[관직]]이다. 탐라국은 상기했듯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들어오기 전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도동음률]](徒冬音律)[* 또는 탐라국 왕 유리도라(儒李都羅)]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제주 고씨 족보》에 따르면 처량왕(處良王)이 이때 왕인데, 후대에 지어진 족보보다는 당대 기록 쪽이 당연히 신빙성이 높다. 도동음률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서 유리도라라는 이름은 《[[신당서]]》와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 등장한다. '도'(徒)는 이두로 [[http://naver.me/FSNQpEY5|'네']]로 읽히고 [[유리 이사금|유리]]는 '누리', [[박혁거세|'내']]이므로 서로 같은 이름이다.] 한편, 663년, [[신라]], [[당나라]]와 [[백제]] 부흥군, [[야마토|왜]]의 양대 연합군이 맞서 싸운 [[백강 전투]]에 탐라국도 백제/왜 연합군측에 참전했다고 보는데 이는 《[[구당서]]》 <[[유인궤]] 열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가령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에서는 [[https://www.jeju.go.kr/culture/history/period/period02.htm|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 왜군과 연합해 나당동맹군에 맞서 싸웠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탐라는 한중일 역사서에 모두 나오는 이 전투 관련 기록을 통틀어봐도 《구당서》 <유인궤 열전> 이외엔 언급이 없고, 그 《구당서》에서도 백제•왜 연합군 잔병들이 항복할 때 탐라인도 같이 데리고 항복했다는 구절이 전부라 이 전투에서 비중이 미미해 본격적으로 많은 병력을 보내 참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662년 도동음률의 신라 항복과 663년 탐라가 백제부흥군의 편을 들었다는 두 기록은 [[모순]]되는데, 둘을 모두 인정할 경우 당시 탐라는 백제/왜와 신라/당이라는 양대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당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679년]]에 신라가 다시 한 번 탐라국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662년]]의 항복은 형식적인 것이고, 한반도의 정리가 끝난 [[679년]]에 신라가 여유가 생긴 뒤 본격적으로 탐라를 속국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662년]]의 신라는 백제 부흥군 상대하랴, 고구려 상대하랴, 그리고 곧 [[나당전쟁]] 준비하랴 바빴기 때문에 탐라국에 신경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일본 쪽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직후인 661년에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를 보낸 이후 수 차례 탐라국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등 사비백제가 붕괴한 이후 탐라국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활로를 모색한 흔적이 보인다. 탐라국과 일본의 교류는 693년 사신 가라(加羅)를 일본에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리고, 이후로는 일본이 탐라국과 연락할 일이 생겨도 직접 하지 않고 신라 조정을 통하는 식으로 바뀐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이즈음부터 신라의 탐라 통제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