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타르 (문단 편집) ==== 러시아 사회로의 흡수 ==== > 몽골-타타르 칸국들을 병합하게 되면서 [[이반 4세]]는 자신의 전임 통치자들이 겪지 않았고 따라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무슬림과 그들의 거주 지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게 되면서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관계를 적극적으로 설정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모스크바 국당국의 초기 대응은 공격적인 억압책이었다. [[카잔 칸국]]을 정벌한 후 이반 4세는탄압과 강제개종을 이 지역 무슬림을 다스리는 종교 정책으로 삼았다. 이슬람 사원들은 파괴되었고, 무슬림들에게는 정교로의 개종과 세례가 강요되었으며, 이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이들에게는 최고 사형에 이르는 형벌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스트라한 칸국]] 정벌을 전후한 시기부터 모스크바 국 당국의 이슬람 정책은 순화되기 시작했다. 1555년에 무슬림에 대한 강제세례가 금지되었으며,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의 지배층 중에서 차르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이들은 모스크바 국 지배층의 일원으로 수용되었다. > > 이반 4세가 이렇게 변화된 대 무슬림 정책을 펼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모스크바 국이 맞닥뜨리고 있었던 인적자원 부족이라는 현실적 문제 때문이었다. 사실 모스크바 국은 카잔 칸국을 공격하기 이전부터 모스크바 국으로 투항해 오는 무슬림 타타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이들을 슬라브계 귀족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지배층의 일원으로 수용하고, 국가의 핵심 군사력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또한,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하게 됨으로써 광대한 영토와 – 그 대부분은 무슬림이었던 – 많은 수의 신민을 새로이 획득하게 되자 이반 4세는 이러한 정책을 새로운 영토에도 확대 적용하게 되었다. 정복을 통해 모스크바 국의새로운 신민이 된 무슬림-타타르들은 군무(軍務)와 상업 부문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이반 4세 치세의 모스크바 국 지배층은 강압적 통치에 따른 병합지 주민들의 저항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특성을 묵인하면서 국가 발전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을 택했던 것이다. > > ... > 예를 들어, 카잔 타타르에 대한 강제세례가 금지된 해인 1555년에 카잔에는 [[정교회]] 주교구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카펠러가 “실용적 정책”이라는 용어로 정의한 모스크바 당국의 유화적 무슬림 정책은 이슬람에 대한 인정이라기보다는 병합된 지역의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신들과는 다른 신앙 형태에 대한 잠정적 용인, 즉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 아니라,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특정 집단에 대한 일시적 묵인이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의 이슬람종무청 설치도 이러한 구도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 >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171296|예카테리나 2세 시기 제정 러시아의 이슬람 정책과 오렌부르크이슬람종무청(ОМДС)의 역할]] [[스테판 라진]] 및 [[예멜리얀 푸가초프]]의 반란 당시, 타타르를 포함한 볼가강 및 우랄산맥 일대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봉기에 합류했다. 이 때문에 결국 러시아 제국 정부는 1784년 타타르인 귀족이었던 모르자(морза / morza)[* '귀족'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미르자( / mirzâ)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러시아어로는 무르자(мурза / murza)라고 한다.]에게 러시아 귀족에 상응하는 권리를 보장하고, 1788년 [[오렌부르크]]에 오렌부르크 이슬람 종무원(Оренбургское магометанское духовное собрание)을 설립하여 볼가강 및 우랄산맥 일대와 중앙아시아 무슬림 소수민족 관리의 상당 부분을 이들에게 일임했다. 19세기 초부터 [[카잔]] 대학은 러시아 문화를 타타르인과 카자흐인에게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교육정책을 크게 강화했다. 당대의 러시아인 튀르크 학자이자 정교회 선교사였던 니콜라이 일민스키(Николай Ильминский, [[1822년]] [[4월 23일]] ~ [[1891년]] [[12월 27일]])는 학교를 추가로 설립하고, 볼가 타타르인 교사들을 채용하여 타타르어로 러시아식이나 유럽식 교육을 하게 했다. 서구식 교육의 확대는 볼가 지역의 대다수의 타타르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타타르인들의 서구화 교육과 근대화 운동은 '''자디드주의'''(җәдитчелек / cäditçelek, 러시아어로 джадидизм) 운동이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자디드주의자로는 교육가이자 타타르 민족주의자였던 카윰 나스이리(Каюм Насыйри / Qayum Nasıyri, [[1825년]] [[2월 2일]] ~ [[1902년]] [[8월 20일]])가 있다. 농촌 종교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잔과 부하라의 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아랍어, 페르시아어, 우즈베크어를 공부했다. 러시아어는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한동안 러시아 신학교에 비교종교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1871년 신학교를 떠나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교육관에 입각하여 이슬람 과목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산수, 지리, 역사, 음악, 미술 등도 가르쳤다. 이 외에도 타타르어로 된 러시아어 학습 교재와 타타르어-러시아어 사전을 저술하고 볼가 타타르인들의 구전 문학을 수집하여 기록하는 등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카잔 대학에서 교육받은 무슬림들은 러시아 문화에 상당수준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튀르크와 무슬림 문화유산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많은 볼가 타타르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영토 각지에서 자디드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중 일부는 러시아 영토 밖 [[동튀르키스탄]]으로도 건너가 교육 봉사를 하며 그곳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위구르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