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자기 (문단 편집) ==== 공병우 세벌식 ==== ||<-5>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장.svg|width=26]]]]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fffff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551호 ||<|2> ← || '''552-1호·552-2호''' ||<|2> → || 553호 || || 압사기 || '''공병우 세벌식 한글 타자기''' || [[현대 포니|현대자동차 포니1]] || || [youtube(DycIAvz761M)] || || 세벌식 타자기 타이핑 영상[* 타자기 모델은 동아 마라톤 3000DLX. 최후기형 세벌식 타자기다.] || [[파일:external/pat.im/8712792416.jpg|width=400]]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의 한글 글꼴. 글쇠는 옳은 자리에서 눌렀지만 힘이 어설프게 들어가서, 활자만 찍히고 둥글대는 움직이지 않아 마치 글쇠를 잘못 누른 것처럼 '사람'이 찍혔다. 수동 타자기는 컴퓨터와 다르게 글쇠를 누르는 힘으로 활자대를 움직여 활자를 찍고 둥글대도 움직인다. 글쇠 누르는 힘이 모자라거나 기계부 상태가 나빠서 힘 전달이 제대로 안 되면 이처럼 자간이 맞지 않게 글이 찍힐 수 있다. 컴퓨터에서도 글쇠를 눌렀으나 잘 누르지 못하여 오타가 나는 것처럼, 타자기로 자간이 어긋나게 글을 친 것도 오타에 들어간다. 찍은 글을 곧바로 지울 수 있게 수정 테이프가 달린 타자기가 아니라면, 이렇게 찍힌 글은 수정액이나 수정 테이프를 입히고 그 위에 다시 글을 찍거나 손글씨를 써서 고쳐야 했다. (출처: [[http://pat.im/959|세대를 나누어 살펴보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 - 2. 두째 세대 (1960년대)]])[* CCL로 배포되는 사진은 아님. 교육·연구·토론이 목적일 때에 웹 게시판, 개인 블로그에 출처(글 제목과 웹 주소 등)를 밝히고 인용할 수 있음.] 대량 생산·보급된 최초의 한글타자기로 1950년 1월 미국 언더우드사에서 제작된 공병우 타자기 시제품 3대가 인도되는 것을 시작으로 6·25 전쟁(1950~1953) 중 군용으로 일부 도입되기 시작하여, 1953년에 이르러서는 250대가 도입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대량 생산되어 1965년까지 누적 판매량 3만대의 기록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1960년대까지 20년간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대량 생산된 한글 자판에서는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가 사실상 원조로서 오랫동안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사실 그 이전 40~50년대 타자기가 한창 개발 중이었을 때에는 초성·중성·종성을 묶어 한 글자로 만드는 한글 조합방식을 타자기로 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한글은 기계화가 불가능한 문자”라고 여겼다. 때문에 나온 대안이 [[풀어쓰기]]. 다행히 1940년대 공병우 박사가 한글 창제 원리에 따라 초성, 중성, 종성을 한 벌로 배치하는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하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한글의 기계화가 성공하였고, 이로써 한글 문서의 생산 속도에 엄청난 진보가 있었다. 이후 개발된 두벌식이나 네벌식과는 달리 한글이 4개 열을 차지하고 있어 시프트를 누르는 횟수가 확연히 적었다. 공병우 박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평문 타자 시 공병우 세벌식은 시프트키를 1%만 사용하지만, 네벌식은 10배나 더 많은 10%를 사용하고, 두벌식은 20배나 더 많은 20%를 사용한다고 언급하고 있다.(공병우,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 지식산업사, 157~161페이지) 더군다나 초성과 중성은 시프트 없이도 모든 자모음을 입력할 수 있어 윗글쇠 자리에 기호를 넣거나 영문을 넣어 한영 타자기로 만들 수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쌍초점'''이었다. 초점이 하나(단초점)인 일반적인 타자기와는 달리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는 초점이 2개인 쌍초점이었다. 1950년대 맨 처음 나온 공병우 타자기를 제외하고는 초성과 중성이 오른쪽 초점에 움직글쇠로, 종성이 왼쪽 초점에 안움직글쇠로 배정되었다. 이 쌍초점 방식은 1940년대 공병우가 직접 개발한 방식으로, 한국과 미국에 특허를 출원했다. 1950년대 타자기는 초성만 오른쪽 초점/움직글쇠였고 중성, 종성은 왼쪽 초점/안움직글쇠였다. 거기에 된소리를 나타내는 첫소리 겹낱자 ㄲ, ㄸ, ㅃ, ㅆ, ㅉ도 따로 글쇠 자리가 배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안움직글쇠를 적고 두고 첫소리 겹낱자를 두지 않는 구성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기호를 더 많이 넣을 수 있고 영문 타자기(모두 움직글쇠)를 공병우식 타자기로 개조하는 수고를 덜 수 있는 구성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른 속도로 글씨를 쳐나가는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의 등장은 남북 분단 이후 남한에서 [[한글전용]]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세로쓰기]]로 고착되어 있던 한글 정서법을 [[가로쓰기]]로 전환해야 한다는 발상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로 먼저 전환을 시작한 쪽은 북한이었으나, 정작 북한은 타자기의 개발이 늦어 1950년대 중반까지도 공문서를 수기로 작성하여 등사하는 방식으로 생산하였고 한글전용과 가로쓰기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다. 기계식 타자기 1대만 있으면 당시로서는 엄청났던 속도로 문서 생산이 가능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파일:1041888282.jpg]] 특히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가 효용을 발휘한 곳은 [[6.25 전쟁]] 중의 군대였다. 군대는 신속한 문서 생산이 생명인 기관이다. 군대에서 정말로 '''[[명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직무사항은 필히 양식 있는 문서화가 되어 하달된다. 명령이라는 게 워낙 강제성이 강하며 명령자/피명령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순간부터 주어지는 책무가 커서 그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은 세벌식 타자기의 효용을 알아보고[* 재밌게도, 이에 반해 육군의 [[백선엽]] 장군은 "타자기로 쓴 문서는 한자가 없어 알아보기 힘들다"며 공문을 펜으로 써서 올릴 것을 고집했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공문을 한글전용으로 해야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나서야 다시 육군에서 타자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군 본부에 이 타자기를 투입하여 그 효과를 검증하였고, 이후 유엔군 사령부에도 이 한글 타자기가 들어가 역사적인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협정]]문 국문본 원본이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로 작성되기에 이른다. [[대한민국]]은 정전협정의 당사자로 참여하기를 거부하였기에 협정 당사자는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 뿐이었다. 따라서 정전협정문 국문본은 순전히 북한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북한에 타자기가 없었던 이유로 협정문 국문본을 유엔군 측에서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로 작성하였다. 세벌식 타자기의 빠른 타자 속도는 위에서 언급한 쌍초점 방식의 영향이 컸다. 일반적인 타자기는 '입력 딜레이' 가 엄청 심하기 때문. 활자가 한번 박혔다 다시 되돌아가기 전에 다른 활자가 들어오면 Jamming 현상이 발생한다. 이른바 '활자 꼬이는' 현상. 당시 타자능력검정시험 1급 기준이 제한시간 5분에 정타수 1,250타(분당 250타) 이상이었다. 하지만 쌍초점 방식은 종성 활자가 다른 초점에 찍히므로 빠르게 타자를 쳐도, 심지어는 앞 음절 종성과 뒷 음절 초성을 동시에 쳐도 활자 꼬임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벌식 타자기는 수동타자기의 구조적인 문제인 입력 딜레이 현상을 무시하고 빠른 타자가 가능했다. 그 외에 다른 한글 타자기에 비해 시프트를 덜 눌러도 된다는 장점으로 인해 속도 면에서도 손의 피로도 면에서도 세벌식이 유리했다. 1950~1960년대에 시행되었던 각종 타자 빨리치기 대회의 기록과 수상은 사실상 공병우 세벌식이 독식하였을 정도. 그러나 세벌식 타자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한 가지 있었다. 세대마다 자판 배열이 계속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정한 국가 표준에 의해 고정됐던 두벌식이나 네벌식에 비해 세벌식 타자기는 국가 표준도 아니었고, 공병우 1인, 혹은 한글문화원이 지속적인 개발을 통해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자판이 자주 바뀌었다. 거기에 문장용, 체재용, 속도용 등 사용 목적에 따라 자판 배열이 달랐다. 심지어 같은 세대임에도 배열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벌식의 잦은 자판 변동은 타자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컴퓨터 세대로도 이어져 세벌식 자판이 3-90 자판과 3-91(최종) 자판 두 가지로 사용자가 양분되는 결과를 낳았다. [[파일:나무_한글표현형태_예쩨.png|width=400]] 덧붙여 세벌식 타자기는 문자 변조 가능성에 관한 문제도 존재했다. 왜냐하면 받침이 있는 모음과 받침이 없는 모음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일'로 수정하기가 쉬웠다. 이는 세벌식 타자기의 주된 특징인 빨랫줄 글꼴(탈네모꼴 글꼴)에 기인했다. 즉 네모꼴이 아니라 받침이 없으면 받침 자리가 아예 비어 버리기 때문에 받침을 적어 넣기만 하면 변조가 가능했던 것. 특히 이러한 빨랫줄 글꼴은 반듯한 네모꼴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대에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문자 변조에 관한 문제는 이 타자기 개발자인 공병우도 인지하고 있었을 정도.[* 다만 세벌식 타자기 글꼴 변조가능성으로 인한 피해사례는 실제 보고된 사례가 없다. 흔히 예시하는 ‘일’과 ‘이’의 문제는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하거나 숫자를 병기함으로써 쉽게 해결될 문제이고 굳이 한글로 쓸 이유가 없으며(세벌식 타자기는 숫자 입력을 지원한다), 계약서를 적더라도 변조가능성이 있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부분만을 당사자가 수기로 기재하는 방법도 있다. 위에 언급한 정전협정문이 대표적인 사례. 협정조항은 타자기로 작성한 후 체결, 발효 일시만을 수기로 적어넣었다. 그 밖의 문장가들의 문장에는 변조가능성이 문제될 여지도 없다. 따라서 세벌식이 배척된 데에는 단순히 탈네모꼴 글꼴의 ‘익숙하지 않음’이 가장 큰 문제였고 변조가능성은 핑계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오늘날 실질적인 한글전용이 이루어진 후 탈네모꼴 글꼴은 재평가를 받고 있고 오히려 가독성이 네모꼴 글꼴보다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결국 세벌식 자판은 네벌식이나 두벌식에 비해 시프트를 훨씬 덜 누르게 되어 손의 피로도가 적고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이유로 국가 표준으로 채택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세벌식 자판이 표준이 되지 못한 이유가 박정희[* 1969년 네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제정했다.]나 전두환[* 1982년 두벌식 자판을 표준 자판으로 제정했다.]의 폭압 때문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컴퓨터 환경에서도 세벌식 자판이 두벌식 자판보다 낫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에 당시의 엄혹한 시대에 대한 피해의식이 투영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속적인 개발 덕분에 한글과 로마자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한영 타자기가 생산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한영 혼용 타자기는 95% 이상이 공병우 세벌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외에 이윤온[*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 회사에서 활동하던 기술자 중 한명이었다.] 세벌식 타자기가 있는데, 겉으로는 두벌식처럼 보이지만 왼편에 받침 글쇠가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것도 엄연히 세벌식이다. 글씨체도 세벌식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전신 타자기에서는 세벌식이 강점을 보였기 때문에 1969년 네벌식이 표준으로 지정된 후에도 전신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벌식이 표준이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한글 기계화로 국민 문자 생활의 새 시대를 열어 대한민국의 산업화·정보화에 큰 역할'''을 하였고, '''한글전용, 가로쓰기가 보급되어 정착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을 뿐 아니라, '''현대 한글의 컴퓨터·디지털화까지 이어지는 가교 역할'''까지 했다는 데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공적이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중 최초 모델 두 점이 [[2013년]]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등록문화재]] 제552-1, 552-2호로 지정되었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가 강세였던 1960년대까지는 타자기가 비싸고 보편적인 기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관공서나 군부대, 일반 기업에서 그나마 쓰이던 세벌식 타자기도 1969년 네벌식, 1983-84년 두벌식 표준이 제정되면서 상당수가 폐기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70-80년대에도 공병우 타자기는 지속적으로 생산됐지만 정부 표준이 제정되면서 수요가 급감하자 생산량이 급감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는 50~60년대 타자기 시장을 거의 독점한 양산 타자기임에도 잔존수량이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 생산수량이 적었던 50년대 초 최초 생산분이나 90년대 초 최후 생산분의 세벌식 수동 타자기가[* 3-90 자판 [[https://m.dcinside.com/board/typewriter/117|#]] ] 대량 양산 제품치고는 상당히 희귀한 편이고, 60년대 김동훈 다섯벌식에 대항하는 제품으로 생산한 공병우 네벌식 반(체재식) 타자기나 1969년 정부표준 제정이후 생산했던 공병우 네벌식 등의 제품도 찾아보기 어려운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