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완섬 (문단 편집) == [[타이완섬/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타이완섬/역사)]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8,000년 전에 유라시아 동남쪽에서 타이완 섬으로 이동해 온 후 정착한 집단은 [[대만 원주민]], 다른 섬으로 진출한 집단은 [[폴리네시아인]]들이라고 한다.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D%8F%B4%EB%A6%AC%EB%84%A4%EC%8B%9C%EC%95%84%EC%9D%B8-%EC%9D%B4%EC%A3%BC-%EA%B2%BD%EB%A1%9C-dna%EB%A1%9C-%EA%B7%9C%EB%AA%85|링크]] 대만 섬이 처음으로 역사에 드러난 것은 [[230년]] [[오나라]]의 [[손권]]의 명령에 의해 [[위온]]과 [[제갈직]]이 백성을 징발하기 위해 이 섬에 상륙하면서부터였다. 결과는 대실패. 데려간 1만의 병력 대부분을 잃고 얻은게 [[대만 원주민|원주민]] 1천여 명이라 위온과 제갈직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손권에게 [[교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중세시절에 타이완 섬 중서부[* 영토는 현재의 [[타이중시]] · [[장화현]] · [[난터우현]] 일대라고 한다.]에서 파포라족(巴布拉族)을 중심으로 바부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宰族), 호아냐족(洪雅族), 타오카스족(道卡斯族), 카하브족(噶哈巫族)이 연합하여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을 건국하였으며 원주민들은 대만에 정착한 한족들과 교역을 하기도 했지만 조선이나 일본은 물론 옆에 있는 [[오키나와]] 섬의 [[류큐 왕국]]에 비해서도 외부의 영향과 교류가 적었고 체계적인 문명의 형성이 늦었다. 근세시절 [[1624년]] [[네덜란드]]가 [[타이난]] 지역에 상륙하여 대만 남부를 식민지화하고 뒤이어 [[1626년]] 스페인이 대만 북부를 식민지화했고 그렇게 남북에서 유럽의 두 국가 세력들이 중서부의 다두 왕국을 압박해왔다. 그러다 당시 견원지간이었던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에서 세력을 다투었고, [[1642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타이완에서 몰아낸다. 이후 [[164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대만 북부의 케타갈란족(凱達格蘭族)을 공격해 무찌르는데 성공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다두왕국을 공격하였지만 다두 왕국의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이 네덜란드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1642년 8월 네덜란드는 한때 스페인이 식민지화 해서 차지한 대만 북부와 본인들이 차지한 남부를 연결하기 위해 서부 평원의 원주민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1644년에 네덜란드의 선장 피터 분(Piter Boon)은 북부 지역의 순종하지 않은 원주민 토벌을 위해 네덜란드 원정대를 이끌었고 그 다음해인 1645년 다시 다두 왕국에 두번째 공격을 감행하여 다두 왕국의 통치를 받고있던 반네덜란드 성향의 13개의 부족 마을을 파괴하자, 당시 18개의 다른 부족 촌락의 지도자였던 다두 왕이자 파포라족의 카마찻 아슬라미에(Camachat Aslamie)에는 즉위 말기에 파포라족을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부족의 안전과 평화회담을 위해 사이먼 반 브린(Simon van Breen) 목사의 중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며 네덜란드에 무릎을 꿇고 네덜란드가 주최하고 있는 노스 로드 회의에 참석한다. 그리고 [[1645년]] 4월에 아슬라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남부 지방 회의에 참석하였고 네덜란드는 무력으로 굴복시킨 아슬라미에한테 강제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항복 조약을 서명 및 체결하게 만들어 다두왕국이 네덜란드에 항복하고 복종했음을 명시하여 다두왕국을 [[속국]]으로 삼고 한때 스페인이 지배했던 북부를 비롯한 대만 섬 전부를 점령하고선 본격적으로 모든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타이완 섬에 정착하거나 수입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한다.[* 여기서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배운 한족들,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를 배운 원주민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슬라미에는1645에 우강(烏溪) 유역 지대를 중심으로 다자시(大甲溪) 남쪽 기슭에서 동루어시(東螺溪) 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리며 여전히 다두 왕의 칭호를 유지하면서 다두 왕국을 반독립 왕국으로 계속 통치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역시 아슬라미에의 사후, 다두왕국의 세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키는데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한편 [[정성공]]은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 난징을 거의 되찾을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7세기 중반 대륙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에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명나라]] 부흥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섬을 노렸다. 1661년 4월 29일에 [[타이난]]을 공격[* 프로빈티아 요새, 제일란디아 요새], 네덜란드령 대만의 반네덜란드파의 원주민들, 한족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봉기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해서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아[*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 요새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제국]] 세력을 몰아내고 대만 남서부를 차지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동녕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은 수백명의 네덜란드 남성을 고문, 학살하고 여성들은 노예로 삼았다.[* 정성공 자신도 전직 네덜란드 관료였던 선교사 Antonius Hambroek를 참수하고 그의 딸인 백인 소녀를 첩으로 삼기도 했다.] 정성공은 그곳의 [[대만 원주민]]들과 한족들에게서 네덜란드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영웅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렇게 한족들은 동녕 왕국에 흡수되었으며 동녕 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다두 왕국을 통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고 이들에게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물건제작을 가르쳐 주는 등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어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다. 그러나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동녕 왕국과 남부의 평포족 간의 갈등이 생겨났고[*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 아 텍 카우종(阿德狗讓 / 1592년-1661년)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했다.] 원주민들을 좀더 세력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탄압해 학살하거나 세력권 안에 있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녕 왕국과 원주민들 간의 갈등 끝에 [[사록사 전투]]가 일어났다.] 또한 정성공은 [[동녕 왕국]]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도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은 동북아시아사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정성공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타이완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나라]]에게 반기를 들어 청나라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683년]] 7월, 청나라와 동녕 왕국 사이에 벌어진 [[펑후해전]](澎湖海战)에서 동녕 왕국의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동녕 왕국은 더이상 청나라에게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동년 10월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동녕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1683년]] [[강희제]]가 동녕 왕국을 멸망시킨 후에 [[청나라]]는 미개척된 [[타이완 섬]] 동북부에 진출하여 그곳을 정복했다. 한족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토지를 빼앗긴 원주민들은 계속 산악 지대로 밀려났다.[* 이로 인해 [[툰샤오 사 사건]]이 벌어진다.] 결국 [[1732년]] [[옹정제]] 통치 때에는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다두 왕국은 멸망한다.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다두 왕국의 영토는 [[청나라 치하 타이완 섬|청나라의 관할]]이 되었으며 청나라는 [[타이완 섬]]을 [[푸젠성]] 영토로 편입시키고 [[타이난]]을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 후에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자 [[타이완 민주국]]을 세우며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끝내 굴복하고 [[대만일치시기|일본 식민지배]]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정확히 50년이 있었으며, 그 이후로는 [[중화민국]]에 소속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49년 분단 이후로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이 섬을 [[타이완성(중화인민공화국)|자국의 영토로 주장해오고 있다.]] 타이완 섬에서는 [[타이완성]]에 속한 지역과 타이완성에 속하지 않은 지역이 있는데, 타이완성에 속하지 않은 지역은 [[타이베이]], [[신베이]], [[가오슝]], [[타이난]], [[타이중]], [[타오위안]]의 6대 직할시이며, 타이완 섬의 나머지 지역은 전부 타이완성 소속이다. 단, 타이완성에서도 타이완 섬에 속하지 않는 지역이 있으니 주의. [[푸젠성(대만)|타이완 섬에도, 타이완 성에도 속하지 않는 대만 영토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