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란토 (문단 편집) === 로마 시대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ia_Appia_map.jpg]] 타란토 점령 이후 로마는 [[아피아 가도]]를 타란토까지 연장시켰지만 로마의 동방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한 것은 유서깊은 그리스 개척지 타란토가 아닌 로마인들이 직접 세운 식민도시인 [[브린디시]]였다. 흰 선 (가도)가 움푹 파인 타란토 만과 만나는 곳이 타렌툼, 아드리아 해와 만나는 끝지점이 바로 브린디시. 다만 로마 시대에도 타란토는 좋은 기후로 유명하였고 귀족들이 별장을 두기 즐겨하였다. 2차 포에니 전쟁 시에 [[칸나이 전투]] (기원전 216년)로 전세가 카르타고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로마는 타란토가 한니발에 항복할 것이 두려워졌다. 기원전 212년에는 타란토의 친카르타고 시민들이 붙잡혀 [[캄피돌리오 언덕|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끔살 (높은 곳에서 바위 위로 떨어뜨렸다...) 당하였고 타란토 주둔군도 증원되었지만, 결국 그해 말에 한니발은 도시에 입성하였다.([[1차 타렌툼 공방전]]) 다만 아크로폴리스 (시타델)의 로마군은 저항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209년, 전세가 로마 측에 유리해지자 카르타고의 동맹군이었던 한 이탈리아 부대가 로마 군에게 항복하였다.([[2차 타렌툼 공방전]]) 로마는 재차 타란토 시민 3만 명을 노예로 팔아버렸고 [[니케]] 상을 포함한 귀중품을 가져갔다. 기원전 122년, 로마인들은 타란토 인근에 넵투니아 라는 식민 도시를 만들었는데, 결국 그리스 도시인 타란토의 시가지에 흡수되었다. [[동맹시 전쟁]] 이후인 기원전 89년에 타란토는 시민권이 주어진 무니키피움이 되었다. 기원전 37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만나 2차 [[삼두정치]]를 기원전 33년까지 연장한다는 타렌툼 협약을 맺었다. 한편, 청동판에 세겨진 타렌툼의 시 헌장이 1894년에 발굴되었다.[* 현재 [[나폴리]]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2세기부터 타란토의 인구는 줄기 시작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퇴역 군인들의 은퇴를 장려하여 도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