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라불사 (문단 편집) ===== 툴루즈 가문 ===== 같은 십자군 국가지만 안티오크 공국과 [[예루살렘 왕국]] 사이에 위치한 트리폴리 백국은 종종 양측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였다. 베르트랑은 동로마 제독 마누일 부투미타스와 동맹해 안티오크와 맞서려 하였고, 1112년 계승한 아들 퐁스는 예루살렘 왕국과 대립하였다. 후자의 경우 1122년 국왕 보두앵 2세가 트라불로스로 친히 나아가 퐁스의 복속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한편 퐁스의 치세에 트리폴리 백국은 1126년 라파니야를 점령하고 홈스를 습격하는 등 힘을 과시하였다. 1132년 퐁스는 외부 출신의 국왕 풀크에 대항한 안티오크 공작 부인 알리스의 반란 시에 [[에데사 백국]]과 함께 그녀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10월에는 알레포의 이마드 앗 딘 장기가 트라불로스로 진군, 퐁스를 격파하고 몽스 페랑두스에서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풀크가 퐁스를 구원하며 양측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이듬달 퐁스는 장기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트라불로스의 무슬림 라이스 (대표)를 처형하였다. 1137년 3월 이번에는 다마스쿠스의 실권자 바르자와쉬가 몽스 페랑두스를 공격하였고, 퐁스는 반격에 나섰으나 격파당하고 패주하던 중 현지 기독교도에 의해 바르자와쉬에 넘겨져 처형당하였다. 다만 트라불로스 자체에 대한 공격은 시도되지 않았고, 계승한 아들 레몽 2세는 부친을 배신한 산간 지방의 야곱파 기독교도들을 학살하였다. 한편 퐁스와 함께 포로가 되었던 트리폴리 주교 제라르는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이후 포로 교환 때에 석방되었다. 트리폴리 백국의 위기는 이어졌다. 같은해 레몽 2세와 풀크는 바린 전투에서 장기에게 패하였고, 이듬해 장기는 아르카를 점령해 도시를 지척에서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얻었다. 1144년 레몽 2세는 크락 데 슈발리에를 [[구호 기사단]]에 넘겨 백작국의 동쪽 변경을 강화하였다. 1145년 레몽 2세의 당숙 베르트랑이 백작위를 주장하며 트라불로스와 크락 데 슈발리에 사이의 아미라 성채에 웅거하였다. 이에 레몽은 1149년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앗 딘을 초청해 아미라 성채를 점령하게 하였고, 포로가 된 베르트랑에 대한 석방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 한편 트리폴리 백국의 약화는 점차 가시화되었다. 1151년 여름 파티마 함대가 트라불로스 항구를 습격해 선박에 방화하고 수백여명을 죽이거나 납치하였다. 이듬해 레몽 2세는 아내 호디에르나와 충돌하였고, 이에 후자의 언니 멜리장드와 보두앵 3세가 트라불로스에서 왕실 모임을 열어 화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도시로 귀환하던 레몽 2세는 남문 부근에서 아사신 자객의 습격을 받아 동행한 두 기사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분노한 군중은 시내의 무슬림들을 공격하며 분풀이하였다. 레몽의 암살을 틈타 누르 앗 딘은 타르투스를 일시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고, 트라불로스에 계속 머물던 보두앵 3세이 개입으로 상황은 겨우 안정되었고 레몽 2세의 아들 레몽 3세가 계승하였다. 그는 1161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자신의 누이 멜리장드와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에 분노하여 동로마령 키프로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1163년 레몽은 부카이아에서 누르 앗 딘을 격파해 명성을 떨쳤지만. 이듬해 하림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안티오크 공작과 달리 그는 석방 협상 대상에서 배제되었고,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가 섭정을 맡았다. 1170년 시리아 대지진 당시 트라불로스의 성벽 역시 붕괴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한편 누르 앗 딘과 이집트를 두고 경쟁하던 아모리는 동로마 측에 지원을 청하기 위해 1171년 3월 트라불로스를 출항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였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레몽 3세는 석방되었는데, 같은해 아모리 역시 사망하자 레몽은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 1177년에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트라불로스에 당도, 현지 십자군과 홈스 및 하마를 공격하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누르 앗 딘의 사후 시리아를 접수한 [[살라흐 앗 딘]]이 반격에 나서나 [[보두앵 4세]]의 반격으로 패한 것이 바로 몽지스가르 전투였다. 1180년 반격에 나선 살라흐 앗 딘은 타르투스를 공격하였고, 이에 레몽은 그와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강경파에 밀렸고, 그 결과 1187년 벌어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하였다. 대부분의 십자군 도시들이 점령되었고 안티오크, 타르투스, 트라불루스, 티레 정도가 유지되었다. 안티오크와 타르투스는 팔레스타인에서 너무 멀었기에 피난민들은 우선 티레, 그 다음으로 트라불로스에 집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