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루이스 (문단 편집) == 전설, 가이나와 후기 크루이스 == 1985년 중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하드를 넘어선 '''헤비'''를 추구하게 된 크루이스. 가이나와 아니치킨은 새로운 멤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예피모프가 ~~굴러들어와~~ 강렬한 드럼 사운드는 확보했고, 가이나의 기타 사운드는 ~~전재산의 반을 날려 산~~ 깁슨과 펜더, 크루이스 창설 이후로 계속해서 성장해 엄청난 수준이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베이스와 보컬이였다. 가이나는 자신의 앳된 소년같은 목소리는 강렬한 음악을 추구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당시에 생각했다. [* 가이나 보컬은 얼굴만 안보고 들으면 청소년급의 목소리라 지금도 가이나는 기타실력은 신이 확실하나 '''보컬은 구리다'''라는 평도 가끔 나온다. 메탈이라면 굵거나, 높거나, [[그로울링]], [[샤우팅]] 등의 기교를 부려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가이나 목소리는 안돼! 라고 외친다. (...)] 그래서 옛 친구인 사리체프에도 부탁해보고, [* 사리체프는 자신의 목소리에 안맞을 거라고 더 강렬한 음악은 거부했다고 한다.] 다양한 멤버들을 영입하려고 했었으나 실패하고, 결국 ~~[[란마]] 같은~~ 자신의 목소리로 가기로 한다. 이렇게 멤버를 재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예피모프와 가이나의 강렬한 느낌을 살리기 위한 곡들을 1984~6년부터 부른 곡들을 마개조하거나 새로 만드는 식으로 스타일을 바꾸고, 새로운 음악은 더욱더 강렬하게 만들게 되는데. 이 곡들은 모은 엘범이 바로 전 소련을 강타한 '''록은 영원하다!'''(Рок Навсегда!) 였다. [youtube(z06bUyDYqFY)] 전환기의 1986년 라이브 공연 녹음본, 구 크루이스 곡부터 후기 크루이스 곡까지 섞여있는 이 공연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1986년의 아직까지 완벽하게 컨셉이 잡히진 않았지만, 더 강렬하고, 템포가 빠르며, 좀 '헤비'하네?! 하는 느낌도 나기 시작한다는 것. 1986년 이후에는 아예 키보드도 빼버린다. 이렇게 공연을 하면서 개편할 준비를 하자, 멤버가 두명 뿐인(...) 시절도 있었다. 예피모프랑 가이나, 이 두명만 남은 시절도 존재한다. 이때는 가이나가 베이스도 직접 치면서 곡을 제작하는 [[근성]]을 보여주며 결국 록은 영원하다! 가 완성이 되어,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아'에 제출한다. ~~이쯤 되면 당연하게~~ 카세트 테이프판도 뿌리고 말이다. 이 뿌린 판들이 퍼지면서, 난리가 난다. 아니 ~~시발 그 디스코 풍 노래 내던~~ 크루이스가 낸 엘범인데 이 미친 사운드를 듣고 소련에 '''이런게 존재한다고?''' 라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물론 1986년, 당시에는 [[아리야]]나 [[초르니 코페]], [[레기온]] 등과 같은 대중적 메탈 밴드는 이미 존재했고, 이중 아리야나 쵸르니 코페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리야는 ~~굴러들어온 볼샤코프의~~ 그 유명한 '''의지와 이성'''(Воля и разум)이 히트를 치고, 이에 질세랴 쵸르니 꼬페는 '''신성메탈'''을 컨셉으로 민족성을 띄는 메탈 곡인 '''블라디미르 루스국'''(Владимирская Русь)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기교와 연주 스타일이 완전히 색다르고, 누구보다도 빠르고, 누구보다도 현란하며, 누구보다도 '자신만의 색'이 있는 크루이스의 등장은 서양 메탈을 접하던 안하던 강렬한 록에 목말라 하던 소련 청년들에게 또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크루이스에 열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 라이브 무대의 현란한 퍼포먼스였다. 가이나와 예피모프는 누구보다도 쇼맨십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거침없이 뽐내는 것을 즐겼다. 이에 관객들도 더 미쳐 날뛰게 된 것. [youtube(BAB8pyfDuyY)] 후기 크루이스 엘범 '록은 영원하다' (1986) 전기 크루이스, 중기 크루이스의 모양새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느낄수 있고, 이 강철로의 변화는 소련 전국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 가끔 유투브에서 볼 수 있는 댓글에 적힌 일화를 보면 당시 아버지가 옛 크루이스를 기대하고 팽이는 팽팽팽 들으러갔다가 기겁한 적도 있다고.] 이중 가장 유명해진 곡은 '''우리랑 함께 가세'''(순례자)(Иди же с нами)이다. 스페인 시인 레온 펠리페(León Felipe, 1884-1968)의 동명의 시(Ven con nosotros)를 번안한 해당 노래는 초반의 가이나의 현란한 기타 연주가 분위기를 극한까지 이끌고, 중간부터 예피모프와 바실리예프가 가세하면서 화합을 이루는 서사시적 명곡이라고 할 수 있으며, 1988년 동독에서 열린 군인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한 팀이 커버해 부르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끈 곡이다. 또다른 히트 곡은 '''최후의 여명'''(Последний рассвет), 엄청난 스피드(약 278 BPM)의 강렬한 음으로 '''미래에 일어날 모든 전쟁'''을 저주하는 곡. 처절한 목소리와 세기말적 사운드가 압권. ~~사실 전기 크루이스의 미친놈들아의 최종진화판이다.~~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자, 본격적으로 베이스를 찾기 시작했고, 구 쵸르니 코페 베이스 연주가인 표도르 바실리예프가 1986년 후반에 합류했고, 3인조 체제로 확고히 하고 전 소련 투어을 시작했다. 모닌 시절의 크루이스 때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때보타 더한 인기를 끌면서, 소련에 헤비메탈을 하는 큰거 있다! 라는 소문이 퍼지며 세계적인 인지도도 늘어나게 되었고, 결국 현란한 공연을 직접 본 [[서독]]의 [[스콜피온즈]]의 프로듀서가 접촉하여, '''해외 공연 예정도 잡히기 시작했다.''' [* 당시 이런 움직임을 허가 한 것은 [[고르바초프]]시기에 소련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경쟁력 확보의 일환이였다. 실력 있는 밴드들 몇몇이 해외 공연을 나가기도 한다. 이중 크루이스는 첫 선봉으로 보면 된다.] [[파일:15786674.jpg]] 후기 크루이스의 3인조 1987년 멜로디아에서 출판된 '크루이스-1'(록은 영원하다! 의 정식발매판)가 공식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중적으로도 알려지고, 해적판이 아니라 정식판도 쉽게 구할수 있어지니 더욱더 인기는 높아지고, 반대 급부로 이를 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이 맞춰지게 된 것. 이 덕분에 작지만 큰 사건이 발생 계기가 된다. 큰 성공 이후 멤버들은 라이브 투어를 위해 소련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볼고그라드]] 공연이 잡히게 되었는데, 당국과 공연 일정을 조율하며 '''영하의 온도에서 스타디움에서 공연하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것이 조건이였는데, 공항에 나오자 마자 한파가 치고 있었고, ~~옛 악몽이 생각나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거기에다 무대는 '''스타디움으로 유지해 버린 상태였다.''' 이미 엄청난 스케줄에 피로가 쌓여있던 가이나와 멤버들도 분노하고, 비협조적인 지역 당국의 무능함 덕에 무대 일정이 꼬이면서 크루이스 공연을 들으러 왔다 눈보라에 파묻히게 생겼고 더군다나 원래 계획된 2일 공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빡쳐버린 15000명의 관중들이 폭도로 변해 현장을 지키던 경찰 5000명에게 병과 불덩이를 던지면서 시작된 충돌이 이후 도시에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져 '''40대의 트롤리버스를 전소시키고, 열차역에 정차한 열차를 부수는 등의 피해를 끼쳤다''' [* 당시 증언에 따르면 2차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일어난 마냥 개판이였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만든지도 모르는 폭발물도 던졌다고.] 이 당시에 가이나는 공연 하는 도중에 공병과 화염병(...)이 무대에도 날아오자 노래하다 말고 '''그만 좀 싸우고 우리 노래를 들어!''' 라고 외치는 등 그야말로 [[개판]]이라는 말이 모자를 [[광기]]의 현장이였고, 가이나의 인생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추억(????)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이때 신문에 실렸는데, 크루이스가 그 폭동을 조장한 [[선동가]]라고 이름이 났었다고. [youtube(Dc0DkoXtZSc)] 이런 저런 소동이 있으면서도 1987~1988년에는 2집 '무쇠철 록'(Железный рок)을 내놓고, [* 정확하게는 2집은 노어판과 영어판으로 나뉘며, 크루이스(Kruiz)와 Iron Rock으로 내놓은 버전이 존재한다. 둘다 서독에서 출판. 러시아판은 불법판으로 돌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공식으로 재발매된다.] 동구권은 물론, 스페인, 서독, 네덜란드, 스웨덴 등 다양한 서방 국가에서 공연을 하면서 좋은 반응을 이끌게 된다. 생소하지만, 현란한 연주 실력을 보여주는 모습에 해외에도 먹혀 들었던 것. 1988년 이후로 해외의 프로듀서(WEA, 현 [[워너 뮤직 그룹]] )를 두게 되면서, 해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나서려고 했으나, 주요한 조건이 있었다. '노래를 영어로 부를 것', 가이나는 영어를 억지로 하게 되면서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어를 구사하니 해외 주요 음악지에서도 "다 좋은데 영어로 말하려고 하는게 문제임" 이라는 지적을 할 정도로 어색하게 들리는 것이 단점이 되었다. [* 해빙 분위기와 함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많은 러시아의 락 밴드들이 자신의 음악을 해외에 알리고자 자신의 노래를 영어로 번안해 발표하는 등 해외 활동을 추구했다. 해외 공연의 경우는 일정 반향을 이끌어내기도 했으나 앨범 발매는 빈말로도 좋은 결과를 이끌지는 못했다. [[키노]]의 Blood Type 번안, [[아크바리움]]의 Radio Silence 앨범, 마스테르의 Talk of the Devil 앨범 등이 그 사례. 유일하게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게 MTV에 진출한 [[고르키 파크]](파르크 고리코보)의 노래 Bang!인데 이마저도 냉전의 끝과 함께 SNL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그래도 새로운 무대에서 열심히 뛰어 보겠다! 라는 마음에 소련갔다 서독갔다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미친듯이' 무대를 뛰었고, 예피모프의 재치있는 '미스터 고르바초프' 드럼, 가이나의 광속 기타, 바실리예프의 묵직한 베이스가 최대효과를 발휘하며 무대를 달구었다. [* 이때 서독 사람들은 처음에는 얘내 그냥 컨셉만 소련놈이지 사실 서방 밴드 아니냐고 오해를 했다 한다.] 얼마나 살인적인 스케줄이였냐면, 가이나가 뮌헨 라이브 공연일때 고열(당시 40도)로 쓰러지기 일보직전 까지 무대를 뛰었다고 회고를 할 지경. 하지만, 이렇게 크루이스는 해외에서 순조롭게 성황리에 무대를 뛰고 있는 와중에, 1989년 프로듀서의 결정에 반발하는 예피모프와 이를 조정하려는 가이나간의 입장차가 깊어지면서, 해체 위기를 겪게 된다. 프로듀서는 새 엘범에는 전자음악 풍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었고, 음악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겠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온 사방에 무대 뛰라고 보내서 무자비하게 부려먹는 것도 서러워 죽겠다고 예피모프는 강하게 반발했고, 가이나는 이렇게 갈갈이 화를 내는 예피모프를 달래다가, 이렇게 부려먹히는 것보다 내가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직접 프로듀서를 하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딴 생각(...) 을 품게 되었고, 1989년 마지막 3집인 컬쳐 쇼크를 내고, 소련으로 복귀해 2시간의 거대한 공연을 마지막으로 1990년에 '''해체'''를 하고 만다. 가이나는 서독에 있는 동안 프로듀서로써 맡은 첫번째 그룹이 있었는데, 그 그룹이 바로 안톤 가르시야가 이끌던 스레쉬 메탈 그룹인 [[샤]]였다. 당시 주목받는 베이스 기타리스트인 아나톨리 크룹노프[* 쵸르니 오벨리스크의 리더, 이때 샤에서 몇년 뛰다가 소련으로 복귀해 쵸르니 오벨리스크를 다시 조직해서 활동한다.] 를 새로 영입한 후 크루이스와 같이 활동하며, 서독에서 다양한 무대를 펼쳤다. 이 성공적인(?) 경험이 가이나의 프로듀서의 꿈을 키운듯(...) ~~이때 누구도 미국 이민 후 [[양준일]] 노래를 만들거라고 예상 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youtube(upi2-ab1_GY)] 3집 컬처 쇼크(Culture Shock, 1989) 곡 분위기 자체가 또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을 건데, 이건 당시에 가이나가 준비하던 미국 진출을 위해서 컨셉을 좀 더 바꾼 것. 3집에서 크루이스 멤버들이 자주 연주했던 곡은 Child of Pride,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