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쿨리 (문단 편집) === 인도계 쿨리 === 인도계 쿨리는 주로 신대륙인 [[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호주 대륙]] 등에 이주한 중국계와 달리 인도계는 [[동아프리카]]와 [[카리브해]] 등으로 주로 이주했다. 1895년 [[영국]]은 [[케냐]]를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보호령을 창설하였다. 영국은 당시 남는 땅이 많았던 케냐에[* 지금이야 케냐가 인구가 한국을 뛰어넘을 정도로 인구가 상당한 나라지만, 이 당시에는 사정이 전혀 달라서 인구가 200만명에도 못미쳤다. 케냐인들이 다산하는 풍습을 현대까지 이어지다보니 인구가 엄청나게 많아진것이다. 당시에 케냐보다 영토가 작은 영국과 이탈리아가 이미 인구 3천만에 달했고, 케냐와 면적이 비슷한 프랑스와 우크라이나는 각각 인구 4천만, 2천만에 달했다. 참고로 당시 조선과 베트남도 인구가 2천만 정도로 추정된다. 정작 당시 인구밀도가 훨씬 낮았던 시절에 그 넖은 영토를 지니고도 원주민들의 땅을 탐내서 쏴죽이거나 오지로 내쫓는것이 미국이나 아르헨티나 호주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많이 부조리한 시절이기도 했다.] [[인도인]]들을 대거 이주시킬 계획으로 동아프리카 보호령에서 [[루피]]를 공식 통화로 지정하고 법률 시스템을 [[영국령 인도 제국]]의 그것의 연장으로 삼았다. 영국에서는 케냐 현지의 행정을 [[고아(인도)]]그 근교 콘칸 지방에서 온 [[가톨릭]] 신도 혹은 [[구자라트]] 지방 출신 [[파르시]]나 [[자이나교]]도 상인들에게 맡기고 경찰력이나 군인들은 [[펀자브인]] [[시크교]] 신도들로 채웠다. 이미 케냐, 탄자니아의 [[스와힐리]] 해안 지대는 영국이 식민화하기 한참 이전 중세시대부터 인도계 상인들과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약 2,000만여 명이 사망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던 [[1896년]]에서 [[1901년]] 사이에 약 32,000명에 달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이 [[우간다]]에 철도를 건설할 목적으로 아프리카로 이송되었다. 철도 노동자들은 오늘날 [[펀자브(파키스탄)]] 지방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라호르]]에서 모집되었다. 당시 철도 건설 과정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 및 [[고스트 앤 다크니스|맹수들의 습격]] 등으로 트랙 1마일당 약 4명에 해당하는 2,50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철도의 완성 이후 철도 노동자들 중 고향에 재산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 주로 [[파키스탄]]과 북부 인도에 걸쳐서 살던 [[시아파]] 소수파였던 보흐라파 인구가 그들이다.]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가족들을 데려오고 이들은 곧 [[케냐]]에 거주하는 친척들과 함께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1962년]] 기준 [[나이로비]]의 인구 중 3분의 1이 인도계였으며 케냐 전역에서 농업 이외에 다른 산업 분야의 4분의 3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63년]]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당시 케냐에 거주하던 인도계 대부분 현지 국적을 포기하고 [[영국]], [[캐나다]], [[남아공]], [[호주]], [[미국]] 등으로 재이민하였다. 이렇게 서구로 이주한 인도계 이주민 후손들은 오늘날의 [[인도계 영국인]], [[인도계 캐나다인]], [[인도계 미국인]], 인도계 호주인, 인도계 캐나다인, 인도계 남아프리카인 인구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다. 한편 [[우간다]]에 잔류한 소수의 인도계 인구는 [[1970년대]] 초반 [[이디 아민]]이 현지 흑인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 하에서 인도인들을 "얼굴에 구두약을 바른 백인"이라고 욕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고, 그 결과 현지에 체류했던 인도인들 상당수가 다시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남아공]]으로 이주한 인도계는 우간다에 잔류한 인도계에 비하면 처지가 괜찮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백인 우월주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1948년]]부터 [[1994년]] [[넬슨 만델라]] 집권까지 2등 시민으로 심각한 차별을 받았다. 동아프리카/남아프리카와 중동 이외에도 [[태평양]]의 [[피지]], [[인도양]]의 [[모리셔스]], [[레위니옹]],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수리남]], [[가이아나]]에도 상당수의 인도계 노동자들이 이주하였다. 1834년부터 1921년까지 약 50만여 명의 인도계 계약직 노동자가 모리셔스에서 체류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및 설탕 공장에서 일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오늘날 모리셔스의 인구 대부분은 인도계이다. 모리셔스와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와 [[수리남]]의 경우 인도인들과 현지 흑인들 사이의 혼혈도 일어났고, 이들은 오늘날 [[수리남인]], [[가이아나인]]의 기원의 한 갈래를 이루게 되었다. 미국의 [[카멀라 해리스]]나 유명 뮤지션 [[니키 미나즈]]가 바로 이렇게 트리니다드 토바고에 정착한 인도계와 흑인 사이의 혼혈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영국령 인도 제국 소속 [[미얀마]]의 벼농사 플랜테이션에는 [[벵골인]]들이, [[말레이시아]]의 고무나무 농장과 [[스리랑카]]의 차 농장에는 [[타밀족]]들이 이주하였으나 스리랑카의 타밀족들의 경우나 미얀마의 로힝야들의 경우 자신들이 인도계라는 정체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쿨리로 치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들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들은 중국계들이 쿨리라고 불리는 과정에서 같이 세트로 묶여 쿨리로 불리는 편이었다. 타밀나두 지방에서 쿨리들이 많이 건너간 이유는 당시 인도의 주요 항구였던 [[첸나이|마드라스]]가 해당 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인도계 말레이시아인]], [[인도계 싱가포르인]] 역시 대부분 [[타밀족]] 출신이다. 그리고 영국의 왕령식민지인 [[영국령 홍콩|홍콩]]에도 인도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홍콩]]에 들어온 인도계는 [[세포이|라스카린]] 용병으로서 [[영국 해군]]의 일원으로 [[1841년]] [[홍콩 섬]]에 상륙한 것이 최초였다. 시크교도 군인들 외에도 무슬림/힌두교도 라스카린 선원들도 상당수 유입되었다. 홍콩의 이슬람 사회와 시크교 사회는 19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간 [[1997년]] 이후에도 로컬 사회를 지켜나가고 있다. 인도계 홍콩인들은 주로 [[구룡반도]] [[침사추이]]에 많이들 정착했으며 덕분에 침사추이엔 홍콩의 흉물이자 명물인 [[충킹맨션]] 등 인도계 거주민 숫자가 많은 곳들이 여럿 있다. 동아프리카/걸프만 일대로 이주한 인도계는 [[구자라트]]나 [[펀자브]] 지방[* 오늘날의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을 포함한다. 덕분에 인도계 무슬림 숫자도 많다.] 출신이 많았다면 태평양, 인도양 혹은 카리브해 식민지로 이주한 인도계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우타르프라데시]], [[비하르]] 지역이나 [[타밀나두]] 지역 출신 하층 카스트들이 많았다. 제국주의 식민지 각지에 정착한 인도계 쿨리들은 현지 음식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들은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인도에서 먹던 것과 비슷한 요리를 개발하였고 그 결과 서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역들 이를테면 동아프리카 해안지대 모리셔스의 요리와 태평양의 피지 요리, 카리브해 수리남 요리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생겼다. 홍콩에서도 마찬가지라 [[광동 요리]]는 [[인도 요리]]의 영향도 걸쭉히 받아 [[커리]]가 현지화되었다. 아무래도 수천년간의 요리 노하우가 쌓인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의 요리 문화가 [[동남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카리브해]] 현지 원주민들보다는 이런저런 장점이 많았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동아프리카 등 척박한 지역들은 말이 필요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