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쿨리 (문단 편집) === 중국계 쿨리 === [include(틀:중국 관련 문서)] [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 중국인 쿨리는 크게 보면 [[화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인]],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프라나칸]]의 조상들도 이 쿨리들이 대부분이다. [[동남아시아]]와 [[호주]]에는 인도계와 중국계 모두 이주가 활발하였고 남아프리카의 경우 중국인 쿨리는 드물고 대개 인도인들이 이주하였다. 물론 중국인들도 이주해 [[요하네스버그]]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서기도 했다. [[아메리카]] 중 [[캐나다]], [[가이아나]]의 경우 한동안 [[영연방]]에 속했던 이유로 인도계 이민과 중국계 이민이 모두 활발하였지만,[* 그 외 [[호주]], [[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에도 금광 및 철도 건설 노동자로 대거 건너간다.] 영연방 소속이 아니었던 [[멕시코]], [[미국]][* 원래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이나 미국 대륙을 잇는 대륙횡단철도 공사 작업원으로 투입되었다], [[페루]], [[칠레]], [[푸에르토리코]], [[쿠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에는 주로 중국계들이 정착하였다.[* 쿨리들이 많이 정착한 [[페루]]는 [[광동어]] 라디오 방송국까지 [[리마]]에 갖고 있으며, 페루식 중국요리가 유명하다.] 그리고 [[브라질]]은 주로 [[일본인]] 이민을 받았으며 사이사이로 [[마카오]] 출신으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중국인들도 섞여 들어왔다. [[라틴아메리카]]에 거진 중국인 노동자들만 가고 [[인도인]] 이주노동자들이 보내지지 않은 이유가 의외로 아주 섬뜩한데 메스티소들과 얼굴이 유사한 인도계 이주노동자들이 도망쳐서 현지 [[메스티소]] 사이에 숨을 확률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미 17~18세기 영국에서는 이른바 [[계약제 하인|연한 계약 하인들(indentured servant)]]을 사기 노예 계약을 맺어 아메리카 대륙 농장에 파견하였는데 이 가운데 80% 가까이가 10년 계약이 만료되기 이전 죽거나 도주하였던 전례가 있었다.] 즉 도망 못 가게 감시하기 편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인도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 고유 전통이 뚜렷한 점도 철저한 가톨릭 신자들인 라틴아메리카의 백인 농장주들이 들여오기 껄끄러워한 이유가 됐다. 이는 나중에 조선으로까지 확대되어 역시 외모가 메스티소 등 현지인과 뚜렷히 구분되고 말 잘 듣는 조선인들을 일본 회사 및 청나라 상인들을 통해 속여서 멕시코 유카탄의 용설란 농장 등에 데려오게 된다. 특히 멕시코로 건너간 쿨리들은 1911년 [[멕시코 혁명]] 당시에 백인/메스티소 출신 멕시코인들에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망하기 정확히 1년 전 일이다.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미국]], [[멕시코]], [[캐나다]],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파나마]], [[쿠바]] 등 [[아메리카]] 국가들로 파견된 중국인 노동자들의 실태를 조사해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에서 자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을 얻어내기 전까지 이들의 처지는 노예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노예제]]로 돌아가던 [[농장]]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지도 못하는 영어나 스페인어로 된 사기 계약서에 서명하고 들어온 중국인 이주민들은 현지 농장주들에게 밥이었다. [[베이징 조약]] 중에는 당시 해외이주를 제한하던 청나라에 대해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청나라인이 영국 식민지 등의 해외에 나가 일자리를 얻는것은 자유이며, 이를 위해 영국의 선박에 탑승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이다'. 즉 영국인으로서 중국인을 노예선에 태울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백인들이 자기네 식민지에 일손이 딸리니까 중국인들을 농노 비슷하게 끌고가고자 한 게 이런 사기 계약이었다. 이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로 끌려간 조선인들도 마찬가지로 일본인이나 청나라인 브로커들이 까막눈인 영호남 등 삼남지방 농민들을 교묘히 속여서 사기 계약을 유도했고 순박한 농민들은 멋모르고 영어/스페인어/일본어/한문으로 된 사기 계약서에 덜컥 서명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도착하자마자 모국어 사용도 2인 이상 동포끼리 집결도 모두 금지당하고 과거 흑인 노예나 마찬가지인 농노 신세가 되었다. 이런 실상이 드러난 것이 마리아 루즈 호 사건. [[페루]] 선적의 마리아 루즈 호가 카야오로 향하던 중에 수리를 위해 [[요코하마]]에 기항하자 쿨리 한 명이 도망쳐나와 '구해달라'며 일본 당국에 호소한 사건으로, 일본이 출항을 금지시키고 조사한 결과 이 배의 모든 계약 노동자들이 문맹으로 어떤 내용인지도 알지 못하는 채 극도로 비인간적인 조건의 계약서에 서명했음이 드러났다. 더 충격인건, '''그나마도 납치당해 끌려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런 참상은 [[마리아 루스 호 사건]]으로 실상을 알게 된 [[청나라]] 조정이 1874년에서 1880년에 걸쳐 멕시코와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으로 관리를 파견하고 협약을 개정함으로서 개선하였다. [[파일:1577529090_38f28ba41a81a1e4ba517f4219d79a6e.png]] 미국으로 간 쿨리들은 주로 [[캘리포니아]] 등 [[태평양]]과 면한 미국 서부 지역에서 일했는데, 계약기간은 기본적으로 8년으로 극도로 열악한 환경으로 이 기간을 채우기 전에 죽는 인원이 전체의 80%에 달했으며 반기를 들거나 고향으로 탈출을 시도하면 총살당했다. 서부에서 이들은 '조니(Jonnies)'라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혹독한 착취는 기본이었다. 오죽하면 그 험한 서부에서 '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아무런 기회도 없다)'라는 숙어가 생겼을 정도. [[제노사이드|백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중국인 마을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물론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다만 세계 각지로 끌려간 중국계 쿨리들은 흑인 노예의 운명을 그대로 이어받지는 않았다. [[모리셔스]], [[수리남]], [[가이아나]] 같은 경우에는 화교들이 현지 사회에서 최상류층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뒷이야기가 있는데, 19세기 영국이 노예 무역을 금지하면서 모리셔스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로 중국인과 인도인 노동자들을 사기계약으로 속여서 모리셔스에 데려왔는데 인도인 노동자들의 경우 여성 노동자들도 상당수 이민 와서 같은 인도인끼리 결혼했지만 중국계의 경우 남녀 이민 성비가 '''9~99:1''' 수준이라 어지간한 부자가 아닌 이상 같은 중국계 여성과 결혼하기 어려웠다. 모리셔스에 정착한 중국인 노동자들 중 나중에 사업을 해서 성공한 중국계들은 본국에서 금의환향한 뒤 다시 배우자를 중국에서 데려오거나 아니면 현지에서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만난 여성과 결혼한다. 나머지 중국계 이민자 남성들은 그냥 중국 본토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현지 흑인 여성과 결혼하는데 흑인 여성과 중국인 남성 사이의 후손들은 흑인 사회에 동화되어 버리고 결국 모리셔스에 남은 중국계 후손들은 부자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인도계 이민자들의 경우 남녀 성비가 3:1 이상 수준이라서 일시적으로 [[일처다부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중국계 미국인]]들의 후예들은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를 자신들의 조상이 건설한 것이라고 하여 뿌듯하게 여기며, [[홍콩 영화]]에서 미국의 개척시대가 나오면 빠짐 없이 쿨리가 등장한다. 전근대시대부터 시작된 대륙횡단 초장거리 철도공사는 문자그대로 사람을 갈아넣는 공사였기 때문에, 철도 침목 하나 놓을때마다 쿨리 한명씩 죽었다라는 소문이 들렸을 정도로 가혹한 노동환경에 수많은 인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똑같은 전설이 있다. 여기에는 쿨리가 아니라 시베리아 강제노역수라는 차이가 있지만.] 황비홍 서역웅사가 대표적이다. 희귀하게 철도노동을 하던 쿨리들의 일부가 [[남북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훗날 이웃 멕시코에서 [[멕시코 혁명]]에 쿨리들과 조선인들이 엮인 것과 똑같다.[* 쿨리들이고 조선인들이고 대거 학살당했고 일부 살아남은 사람들이 백인 농장주들이 도망친 농장을 접수, 현지 메스티소들을 임노동자로 고용하여 농장 일꾼을 늘리고 돈벼락을 맞게 된다. 그리고 일부는 이 틈을 타서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 연안으로 배 타고 달아나거나 미국으로 올라갔다.] 국내에도 [[인천항]] 부두 등에서 항만 잡부 등으로 들어왔으며, 현재 인천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 [[짜장면]]도 이들이 먹던 [[작장면]]이 원조로 한국인의 입맛에 맛게 변형된 음식이다. 사실 짜장면이 서울 쪽인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시작된 덕에 정작 부산 차이나타운에선 서울과의 차별성을 이유로 짜장면을 팔지 않는 가게도 많았는데 요즘엔 수도권 관광객들의 성화로 할 수 없이 다들 짜장면을 판다. 오늘날 중국계한테 "쿨리"는 멸칭으로 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