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마라지바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 쿠마라야나는 [[인도]] [[카슈미르]] 태생의 명문 귀족 출신이었고, 어머니 지바는 쿠차 왕국의 공주였다. 고승전에 따르면 지바가 쿠마라지바를 임신하고 나서 갑자기 생전 배운 적도 없는 언어를 모두 알아듣고 구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쿠마라지바가 태어나고 나서는 그런 능력이 다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는 쿠마라지바라는 인물이 후대에 불경 한역(漢譯)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룰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된다. 356년에 쿠마라지바는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원시 경전이나 아비달마 불교를 배우며 자랐고, 369년에 [[대승불교]]로 전향, 불경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384년에 중국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의 장군 [[여광(후량)|여광]]이 쿠차로 쳐들어왔을 때[* 양고승전에 따르면 여광을 비롯한 전진군이 쿠차를 공격한 것은 쿠마라지바를 중국으로 데려오라는 [[부견]]의 명령 때문이었다. 덤으로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해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았던 쿠차 왕국을 정복하려는 욕망도 있었다.] 쿠차 국왕 백순이 살해되고, 여광의 포로가 된 쿠마라지바는 이후 18년 간 양주(涼州)에서 여광의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여광은 양주에서 [[후량]](後凉)을 세웠다. 여광은 쿠마라지바를 잡아놓고 "네까짓 중놈이 도사들보다 나은 게 뭐냐?" 하며 온갖 수모를 주었는데, 그를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지게 하기도 하고, 쿠차 왕녀[* 즉, 쿠마라지바의 사촌 여동생]를 강제로 쿠마라지바의 방에 밀어넣어 "동침하지 않으면 여자를 죽이겠다." 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이때 쿠마라지바는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율을 어기고 만다. 401년에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그를 맞이해 장안으로 옮기고, 402년부터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역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불교 용어 [[극락]](極樂)이나 [[지옥]](地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들이 모두 그가 번역한 것. 쿠마라지바의 번역 불경은 그때까지와 다른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번역한 것으로, 그 정확성이나 번역 수준이 그전까지의 불경에 비해 상당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번역 스타일은 현장과 비교하면 [[의역]]과 [[직역]]으로 설명되는데[* 현장은 직역, 쿠마라지바는 의역] 원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아미타경 번역에서는 [[공명지조]](共命之鳥)[* 공명조라고도 하며, 몸 하나에 머리 두 개가 있는데, 두 머리가 사이가 안 좋아서 밤낮으로 티격태격 싸우다 결국 한 쪽이 다른 한쪽에게 독을 먹여 죽이지만 몸을 공유하니 나머지 한쪽 머리도 죽고 만다는 전설. 이렇게 사이 나쁜 새도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 [[아미타경]]의 설명이다.] 같은 원전에 없는 내용을 추가했다. <십주경(十住經)>은 쿠마라지바 자신이 가져온 경전이 아니라서 쿠마라지바도 내용을 명료하게 알질 못했다. 이 때문에 쿠마라지바는 원본을 받고도 한 달을 묵혀두었다가 해당 <십주경>에 대해 잘 아는 승려 불타야사(佛陀耶舍)를 초청하여 자세히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번역에 들어갔다. 먼저 다른 사람이 작업한 번역본이 있으면 그 옛 번역본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한 다음 번역을 시작하였고, 번역 용어 선택이나 잘못된 곳을 고칠 때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상의를 거쳐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옛 번역본의 오류뿐 아니라 원어 사본의 오류도 교정을 시도했다. 서역의 음이 틀린 곳은 인도어로 고치고, 중국어가 틀린 곳은 글자의 뜻을 교정하였으며,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기록하고, 다른 이름은 올바르게 고쳤는데, 고친 서역의 음이 반 이상이었다고. 나아가 경전만으로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싶으면 '''관련된 논서를 찾아 대조'''하는 과정까지 거쳤다. 그야말로 현대의 전문 [[번역가]] 못지 않은 수고를 들인 셈.[* 출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9919|불교신문]] ] 쿠마라지바는 죽기 전에 "'''내가 번역한 불경에 조금의 틀린 점이 없다면 내가 죽은 뒤 내 [[혀]]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를 화장하고 나서 보니 그의 혀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쿠마라지바 번역의 생명력은 당장 [[관세음보살]] 항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당장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세음보살(관음보살)이라는 단어보다 현장이 번역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더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세음보살을 더 많이 찾고 더 익숙해하는 편이다.] ||쿠마라지바, 현장 번역이 있는데, 오늘 현장의 번역이 중국입장에서 했으니 벌써 260년 후에 나온 것이니 더 좋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훨씬 쿠마라지바가 아름다운 번역이에요. 현장은 훨씬 인도식 스타일이에요. 인도에 충실하게 번역한 거에요. (현장의 번역 : 직역 스타일 쿠마라지바의 번역 : 의역 스타일) 직역이고 음사도 너무 심하게 하고, 그래서 중국인의 감정의 흐름을 봐도, 현장의 번역이 쿠마라지바의 번역에 비해 떨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 쿠마라지바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http://web.archive.org/web/20190903065900/http://bomber0.byus.net/dohol/archives/000711.html|해당 강의록 전문]]~~이 뒷부분의 깨알 같은 역사 왜곡 및 자기 번역서 홍보~~|| 또한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이 중요한 점은 그의 불경 번역으로 불교계의 폐단으로 지목되었던 격의불교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의 중국, 한국 등에서 불교는 기존의 토착 종교[* 중국의 경우는 주로 [[도교]]]와 습합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당장 공(空)이라는 단어부터가 불교 재래 전까지 중국에서는 주로 도교의 용어였다.] 이러한 격의불교는 포교에 유용하기는 했지만 포교 과정에서 불교 본래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쿠마라지바가 불경을 번역하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경향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것. 또한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서도 영향을 상당히 많이 남긴 사람이다. [[고구려]]의 승려 [[승랑]]이 배운 것으로 알려진 삼론종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불경을 소의경전[* 어떤 종파가 그 종파 교리의 뿌리로 내세우는 경전.]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십성]]의 한 사람인 [[혜공]]이 쿠마라지바의 제자였던 [[후진]]의 승려 승조(僧肇)가 지은 <조론>을 보고 "'''이거 전생에 내가 지은 거야'''"라고 대답했었다고 전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국문학사에서도 쿠마라지바는 언급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쿠마라지바가 불경 번역에 대해 남긴 말[* 위의 쿠마라지바의 발언 가운데 밑에 있는 것]을 인용해 [[한글]]로 창작된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중국식 칠언고시로 번역하려 하는 것을 두고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며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 즉, 한자로 표기하지 않은 순수 한국어]가 소위 ~~배우신 분들~~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급하거나 저속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표현의 참신함과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한국어)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