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데타 (문단 편집) == 과정 == 대부분의 경우, 쿠데타 계획은 사후에 보면 '''어떻게 이렇게 일이 흘러갈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허술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거꾸로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정권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쿠데타 계획'''을 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공한 쿠데타는 '''정권 측의 더 어이없는 실수'''가 겹쳐진 경우가 많다. [[5.16 쿠데타]]도, 장면의 진압요청에 대해 그린 대사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윤보선]] 대통령을 접촉할 것을 권유했고[[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4/18/2002041870402.html|#]], 윤보선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다가 쿠데타를 승인해주고 만다.[* 당시 군부에서 박정희를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이한림]] 대장이 지휘하던 제1야전군에서는 본격적인 출동 준비까지 마쳤으나 끝내 군통수권자의 진압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서 결국 쿠데타를 인정하고 만다.] [[12.12 군사반란]]의 경우도 "[[하나회|반란군]]과의 [[신사협정]]을 믿는다."는[* [[육군본부]]의 수뇌부들이 [[전두환]]의 [[신사협정]]에 응한 가장 큰 이유는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앞에 두고 서울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벌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상대는 [[군사분계선|휴전선]]에 구멍이 나는 것을 알면서도 최전방 예비사단인 9사단을 무단으로 동원한 놈들이며, 또한 쿠데타가 실패하면 [[내란|내란죄]]로 [[바그너 그룹 반란|운명은 뻔한 것]]이므로 [[예브게니 프리고진|반란군들이 신사협정을 지킨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그야말로 상대를 잘못 봐도 너무 잘못 본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육군본부]]의 뻘짓이 아니었다면 반란군 측인 1, 3, 5공수여단보다 진압군 측의 9공수여단이 먼저 서울에 진입하여 보안사령부와 30경비단을 제압하고 반란을 조기에 진압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반란 진압에 실패했던 것은 진압군의 총 지휘자인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동이 묘연했던 것도 큰 원인 중 하나인데, 노재현은 총소리가 들리자 가족들과 함께 도망 다녔지만 [[하나회]] 수중에 떨어진 육군본부로 왔다가 결국 붙잡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