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쾨니히스베르크 (문단 편집) === 역사 === 1255년, 본래 [[발트족|발트인]]들의 영역이던 이 지역에 독일계 [[튜튼 기사단]]이 진출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본래 '[[왕]]의 [[산]]'이라는 뜻으로 튜튼 기사단에게 성의 건설 자금을 지원해 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오타카르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 시대]] 때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와 [[독일왕]]위를 놓고 대립하다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패해 살해당하였다.]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즉, 초기의 쾨니히스베르크는 북방 [[십자군]]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던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기반으로 발달한 군사 도시였다. 본디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는 [[말보르크 성|마리엔부르크]]였으나 1454년 [[폴란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수도 마리엔부르크를 폴란드에 내주며 쾨니히스베르크가 기사단국의 새 수도로 선정되었다. 이후 1525년 기사단장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에 의해 세속화되어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환된 후에도 이곳에 수도를 두었다. 1618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던 프로이센 공국이 [[요한 지기스문트]][*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손녀사위이기도 했다. 프로이센 공국을 노렸던 선조 [[요아힘 2세 헥토어]] 선제후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장녀 안나와 결혼했고,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끝내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았다.]가 통치하던 직계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통합되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수도는 브란덴부르크의 수도 [[베를린]]으로 정해졌고, 쾨니히스베르크는 160여 년간 이어오던 프로이센 수도의 지위를 상실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인되었을 때도 수도는 여전히 베를린이었다.[* '프로이센'이란 이름을 쓰게 된 것은 프로이센이 유럽의 완전 변두리여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왕 칭호를 얻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이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정해진 것은 애초에 호엔촐레른 가문 직계의 중심지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국왕을 칭하기 위해 이름만 빌려준 것이나 다름없는 입지였다. 프로이센 국왕들 중에서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른 국왕은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1세]]와 [[빌헬름 1세]] 뿐이었고 다른 국왕들은 생략했다. [[7년 전쟁]] 중이었던 [[1757년]]부터 [[1763년]] 사이에는 [[러시아 제국]]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은 '''[[동프로이센]]은 전쟁 나면 내다 버리고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이나 제대로 지키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수도 베를린을 함락당했을 때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쾨니히스베르크로 임시 천도하여 이곳에서 [[프랑스군]]에 항전하기도 했으며 [[1945년]]까지 [[프로이센]]의 국가기록원(Preußisches Staatsarchiv Königsberg)이 있었을 정도로 [[독일 제국]] 시대에는 [[베를린]], [[포츠담]], [[호엔촐레른]]과 더불어 위상은 높은 편이었다. 다만, 도시의 상징성과는 별개로 19세기 당시 [[루르 공업 지대]]로 대표되는 독일 서부 지역이 고도의 산업화를 달성한 반면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부의 구 프로이센 지역은 낙후된 농업 경제에 머물렀기 때문에 도시의 위상이 18세기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했다. [[발트해]]와 폴란드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요충지이자 독일 제국의 발원지 중 하나라는 상징성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예비 병력들의 발이 묶였다.~~프리드리히 대왕의 말을 들었어야지~~ [* 동프로이센 출신 융커들이 많아 [[독일 제국군]]이 이곳에 묶여있었다는 서술이 많은데 실제 독일 제국의 융커는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출신이 대다수였다. 동프로이센 출신 융커들은 250년 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에게 전부 진압당해 독일 제국 시기에는 오히려 씨가 말랐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서프로이센]], [[포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와 더불어 러시아 제국의 합병 목표였으며[* 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 대한 야욕은 굉장히 오래되었는데 이곳이 러시아 본토에서도 무척 가까웠을 뿐 아니라 라이벌 프로이센-독일에 있어 상징성 높은 고도로서 승전 시 전리품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7년 전쟁 당시에도 잠시동안 병합한 적이 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이곳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고 기어코 제2차 세계 대전 승전을 계기로 완전히 합병하여 숙원을 달성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에도 차라리 다른 곳을 내줄지언정 동프로이센을 포기하지는 않았고, [[단치히 회랑]]을 내주면서 독일 본토와 분리되었지만 이 지역은 계속 독일령으로 남았다.[* 대신 항구 지역인 [[클라이페다|메멜란트]]를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에 할양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약 500년간 프로이센의 일부였으며 차별 대우도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 대부분이 자신을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생각했으며 동족들의 국가에 통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youtube(g5Idza0B6mA, width=100%)] [[1928년]]의 동프로이센 지역.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 모습.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와 [[단치히]]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면서 다시 독일 본토와의 육상 통로가 연결되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1945년 [[독소전쟁]]에서 [[동프로이센 공세]]를 통해 [[소련]]이 독일을 밀어내고 도시를 점령하며 700년 가까이 이어지던 독일 시대는 종식되었다.[* 1945년 4월 9일 쾨니히스베르크가 함락당했고 4월 25일 소련이 동프로이센 전 지역을 완전히 차지했는데 이 무렵이면 이미 [[소련군]]이 훨씬 서쪽까지 진격해서 [[베를린 공방전]]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독일 동부를 점령하며 베를린 목전까지 소련군이 진격한 시점에 정작 소련 본토와 훨씬 가까웠던 쾨니히스베르크가 아직 소련군에 넘어가지 않았을 만큼 이 도시는 독일에 있어 의미가 정말 남달랐으며 [[독일 국방군]]도 이곳 만큼은 끝까지 사수하려 하였다. 상술했듯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동프로이센 대신 본토와 가까운 서프로이센을 포기한 이유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때문이었으며 결국 서프로이센의 상실로 인한 영토 단절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은 둘로 나뉘어 남부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나머지 지역은 [[소련]](당시 소련에 합병된 동프로이센의 대부분이 [[러시아 SFSR]])에게 귀속되었고, 독일계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말기에 서쪽으로 피난가거나, [[전투]]에서 죽거나, 남은 사람들도 전후 영토 회복의 빌미를 없애기 위해 [[오데르-나이세 선]] 이서의 독일 영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소련으로 할양된 이후에도 잠시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라는 이름으로 쾨니히스베르크의 [[러시아어]]식 표기를 유지하다가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로 개칭되었다. 현재까지 소련-러시아의 몇 없는 [[부동항]]이자 대조국전쟁[* 소련-러시아에서는 독소전쟁을 이렇게 부른다. 한편 어원의 오리지널인 조국전쟁은 나폴레옹 시기 프랑스-러시아 전쟁을 의미한다.]의 최대 전리품으로서 중요성이 높았다. 그러나 [[1991년]] [[9월]] [[발트 3국]]의 독립[* [[소련 해체]] 3개월 전에 발트 3국의 독립을 소련이 승인하며 칼리닌그라드는 월경지가 되었다. 사실 소련이 해체되지 않았어도 발트 3국이 독립한 이상 칼리닌그라드는 월경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전간기 동프로이센이 월경지가 되었던 독일과 비슷한 모양새이다.]으로 인해 러시아 본토와의 육상 통로가 단절되면서 [[러시아]]의 [[월경지]] 영토가 되었다. 소련 시절에야 러시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가 전부 같은 나라였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은 행정적 경계일 뿐이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 이러한 행정상의 경계가 그대로 국경으로 이어지니 상당히 불편한 모양새가 되었다.[* 비슷하게 소련 시절엔 문제되지 않았지만 나라 안 행정경계가 국경으로 변하면서 월경지 문제로 큰 불편이 생긴 사례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국경이 있다.] 현재 러시아에서 칼리닌그라드로 가려면 국내선 항공을 이용하면 상관없지만 육로로 러시아 본토와 칼리닌그라드를 오가려면 무조건 2개국 이상의 국경을 거쳐야 한다. 세계적인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일평생 고향이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100마일 바깥으로는 여행조차 가지 않았고 평생을 이 도시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 바람에 생가, 무덤 등 칸트 관련 각종 유적은 현재 [[러시아]]에 위치한다. 현재도 칼리닌그라드 곳곳에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위인 칸트의 이름을 딴 지명이 남아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nigsberg_bridges.png]] 수학계의 난제였던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2차 대전 중 소련군이 7개의 다리 중 2개의 다리를 파괴했고 현재는 5개의 다리가 남아있다.[* 넷상에서는 우스개소리로 이때의 스탈린을 두고 '기적의 수학자'라 부른다. 모든 다리를 한번씩 다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