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야 (문단 편집) ==== 몽골의 간섭 ==== [[파일:콘야 터키 11.jpg]] 1273년 루미가 사망한 후 공사가 시작되어 몽골측 섭정 무인 앗 딘 술레이만의 조지아계 부인 구루주 하툰의 후원으로 이듬해 완공된 영묘 1243년 6월 카이쿠스라우 2세는 [[몽골 제국]]에 맞서 무슬림 연합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쾨세다으 전투에서 대패한 후 앙카라로 도주하였고, 무방비로 남겨진 콘야는 재상 무하답 앗 딘이 몽골 진영에 찾아가 항복하며 겨우 파괴를 면하였다. 이후 룸 셀주크는 몽골에 복속하였고, 1256년부터는 일종의 [[다루가치]]인 페르반 무인 앗 딘 술레이만이 콘야에 상주하였다. 이듬해 5월 콘야 총독 술레이만이 토카트의 반란 진압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술탄 카이카우스 2세는 니케아 제국군과 함께 콘야를 장악하고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및 [[마야파리킨]]의 [[아이유브 왕조]]와 연대하여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돌아온 몽골군에게 패배한 카이카우스 2세는 동생 클르츠 아르슬란 4세에게 카이세리 일대를 내어주었다. 한편 13세기 중반 콘야에는 몽골 지배를 피해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몰려든 이들이 다수 이주해왔는데, 그중에는 [[수피]] 메블라나 종단의 창시자 [[잘랄루딘 루미]]도 있었다. 1261년 8월 몽골 측의 승인과 함께 클르츠 아르슬란 4세는 콘야에 입성하여 단독 술탄에 올랐고, 카이카우스 2세는 막 수복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하였다. 이후 무인 앗 딘 술레이만이 재차 몽골측 총독으로서 상주하였고, 더 많은 조공을 위해 높은 세금을 거두었다. 1266년 무인 앗 딘은 클르츠 아르슬란 4세를 처형하고 후자의 아들 카이쿠스라우 3세를 옹립하였다. 1271년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가 엘비스탄 전투에서 [[일 칸국]]-룸 셀주크 군을 격파하자 그해 5월 [[카라만 왕조]]-멘테셰 후국의 연합군이 콘야를 점령하고 카이카우스 2세의 아들 치미르를 술탄으로 옹립했으나 이듬달 [[아바카 칸]]이 친정에 나서자 철수하였다. 다만 카이세리와 달리 콘야에서는 몽골군의 학살이 없었다. 복위한 카이쿠스라우 3세는 1284년 일 칸국의 내분에 가담했지만 지는 편이었기에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는 룸 셀주크 왕실 영묘인 알라에딘 자미에 매장된 마지막 술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