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야 (문단 편집) ==== 이코니움 전투 (1190년) ==== ||[[파일:콘야 터키 7.jpg|width=400]]||[[파일:콘야 터키 5.jpg|width=434]]|| |||| 알라에딘 모스크 앞에 남아있는 옛 셀주크 왕궁 유구 |||| 1176년 9월 [[마누일 1세]]의 동로마 제국군이 콘야로 진격했으나 [[으스파르타]]와 콘야 사이의 베이셰히르 호숫가에서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매복에 대패하고 철수하였다. 1190년 [[3차 십자군]]이 다가올 무렵 30년 이상 즉위하여 연로했던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장남 쿠트브 앗 딘에게 섭정을 맡겼고, 후자는 콘야에 파견된 독일측 사신 고드프루아 폰 비세바흐를 맞이한 후 사절 토킬리를 [[트라키아]]로 보내어 십자군의 안전 통과를 약속하였다. 본래 양측의 관계는 호의적이었으나 [[살라흐 앗 딘]]의 사위였던 쿠트브 앗 딘의 심경은 복잡하였고, 술탄이 통제하지 못하는 튀르크 유목민들이 십자군을 습격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분노하자 십자군과 동행하던 사절 토킬리는 고드프루아를 잡아 도주하였다. 이로써 양측은 전쟁에 돌입하였고, 1190년 5월 십자군은 필로멜리온 전투에서 룸 셀주크 군을 격파하고 콘야를 포위하였다. 쿠트브 앗 딘과 클르츠 아르슬란은 성 밖으로 출정했으나 역시 패하였다. 승전 후 독일군은 '[[쾰른]] 규모의 도시'라 묘사된 콘야에 입성하여 닥치는 대로 학살을 자행하고 10만 마르크 상당의 전리품을 약탈하였다. 시타델에서 농성하던 술탄은 안전 통행과 물품 교역을 보장하는 조건의 강화를 제안하였고, 이를 수용한 프리드리히는 5일 후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찬 시내를 떠나 외곽으로 진영을 옮겼고 다시 3일 후 튀르크인 인질과 함께 남하하였다. 그 후 룸 셀주크와 십자군 간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6월에 프리드리히가 살라프 강에서 익사하며 3차 십자군 중 독일 병력은 그대로 와해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