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케테무르 (문단 편집) === 숙적과의 대결이 황실의 갈등으로 커지다 === 베이르테무르는 차칸테무르와 마찬가지로 홍건적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이었지만 [[산시성(산서성)|진]](晉), [[허베이성|기]](冀) 지역을 차칸테무르로부터 빼앗기 위해 그와 계속 다투어왔었고[* 차칸테무르는 한때 베이르테무르의 아버지인 [[다쉬바토르]]의 부하장수로 활동하면서 홍건적을 토벌한 적이 있었다. 이에 베이르테무르는 차칸테무르를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여기면서 그의 권역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사이가 몹시 나빴다. 조정에서 사신을 여러차례 보내와 두 사람을 말렸기에 베이르테무르는 일시적으로 차칸테무르에 대한 공격을 멈췄었지만, 그는 차칸테무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재개했다. 이로써 차칸테무르가 베이르테무르에게 품었던 증오는 코케테무르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1363년에 [[어사대부]] 라오데이샤[* 한자로는 '노적사'(老的沙)]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토겐테무르[* 한자로는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소종(원)|황태자]]에게 간언하다 그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다퉁시|대동]](大同)으로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대동은 베이르테무르의 본거지였다.''' 라오데이샤, 토겐테무르와 모두 친했던 베이르테무르는 두 사람을 그대로 숨겨주었고, 조정에서 두 사람을 찾는 관리를 보내올 때마다 쫓아냈다. 조정의 명령을 거스르는 베이르테무르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역모였지만 이러한 일을 하고도 베이르테무르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사실 혜종이 베이르테무르의 배후에서 은밀히 지시하여 꾸민 일이기 때문이었다. 라오데이샤는 혜종이 어렸을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신하였기에 혜종은 황태자를 자주 꾸짖으면서 라오데이샤에 대한 수색을 그만두라고 명령했지만 황태자는 혜종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갈등이 계속되자 황태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로 조정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코케테무르의 편에 붙어서 도망자들을 잡아낼 방책을 상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무렵에 코케테무르는 본거지를 하남에서 [[타이위안시|태원]](太原)으로 옮겼던 터라 베이르테무르의 세력권과 거리가 가까워졌다. 혜종과 황태자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서로에 대한 원망은 황제를 편들고 있었던 베이르테무르와 황태자를 옹호하는 코케테무르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었다. 두 사람은 기존에 벌여왔던 군사적 충돌을 계속하는 것도 모자라서 시간이 날 때마다 조정에 글을 올려 서로를 모함하기에 이르렀고,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나빠졌다. 1364년, 황태자의 측근인 [[승상]] 초스간[* 한자로는 '삭사감'(搠思監)]과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박부카]]가 베이르테무르와 라오데이샤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황태자에게 알리니 황태자가 대노하여 혜종으로 하여금 베이르테무르의 관직을 박탈하는 명령을 내리도록 청했다. 비록 조정이 황태자 일당에게 장악되어 있었기에 혜종은 하는 수 없이 황태자의 요청에 따랐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베이르테무르의 분노만 사는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 명령에 제대로 화가 난 베이르테무르는 마침내 명령을 거부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라의 경사(京師)인 [[베이징시|대도]](大都)로 진격해왔다. 혜종은 베이르테무르가 대도로 진격해오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기에 초스간과 박부카를 베이르테무르에게 인질로 보내서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베이르테무르는 두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코케테무르는 대도에 있는 부하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베이르테무르를 막도록 했지만 부하들이 모두 베이르테무르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격파되어 그를 막는데 실패했다. 결국 베이르테무르는 혜종의 지지를 받고 조정을 수중에 넣게 된다. 패배한 부하들 중 백쇄주(白鎖住)는 황태자를 데리고 대도를 빠져나와 코케테무르가 있는 태원으로 도망쳐오니 코케테무르는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코케테무르는 백쇄주에게 군사를 내주어 [[우칭구|어양]](漁陽)에 주둔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지속적으로 조정의 동향을 살폈다. 코케테무르가 태원에서 황태자를 보호하며 베이르테무르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생각에 골몰해있는 중에 황태자는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 그는 [[당나라]] [[숙종(당)|숙종]]이 [[안록산의 난]]을 겪는 도중에 피난지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선례를 본받아서 자신도 코케테무르의 지지를 등에 업고 태원에서 [[내란|황제가 되려는]]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야욕을 품었다]]. 결국 그는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코케테무르를 비롯한 신하들의 지지를 구했지만 코케테무르가 다른 신하들과 함께 만류하자 이내 그만두었다. 1365년 4월, 베이르테무르가 황태자파의 내외적인 저항들에 부딪히게 되어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를 알아차린 코케테무르는 군사를 일으켜서 대동을 공격하였다. 코케테무르는 음력 4월 17일[* 양력으로는 5월 8일]에 대동을 포위하여 공격하였고, 공격한 지 열흘만에 성을 무너뜨렸다. 코케테무르의 승리에 의기양양해진 황태자는 그에게 대도로 진격하여 베이르테무르를 완전히 토벌할 것을 재촉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혜종의 명령이 내려왔다. 그 명령은 백쇄주를 도성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하고 황태자를 황궁으로 소환하여 입궐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와 더불어 베이르테무르의 잘린 목도 태원에 전해졌는데, 대동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황궁에도 전해지자 이를 들은 혜종이 하는 수 없이 환관들을 시켜서 베이르테무르를 먼저 주살(誅殺)하고 그를 따르던 일당도 내친 뒤에 그와 같이 조치한 것이었다. 코케테무르가 황태자와 함께 대도로 가고 있는 도중에 황태자의 모후(母后) [[기황후|기씨]]는 코케테무르에게 서신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입궁할 때 [[반란|그의 모든 군대를 같이 이끌고 와서 궁궐을 포위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읽은 코케테무르는 혜종이 황태자에게 양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기씨가 자신의 위세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코케테무르가 비록 황태자를 지지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황제인 혜종을 거역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태원에서 황태자의 제위 등극을 만류했었던 코케테무르는 기씨의 지시를 따라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고, 대도까지의 거리가 30리 정도 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돌연 명령을 내려서 호위 행렬에 참여한 자들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군대를 태원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코케테무르는 이로써 혜종에게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를 행한 것이었지만, 이 때문에 기황후는 물론이고 황태자도 그에게 앙심을 품게 되어 뒤에 그 여파가 겉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혜종 또한 겉으로는 코케테무르를 융숭히 대접하나 내심으로는 황태자를 옹호하던 그를 껄끄럽게 여겼으므로 코케테무르가 조정에서 겪게 될 분란은 필연적인 미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