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케테무르 (문단 편집) === 양아버지의 원수를 갚다 === 차칸테무르는 대륙 각지를 전전하며 가는 곳마다 홍건적들을 크게 쳐부수었고, 그가 거병한 지 10년째가 되는 1362년에는 적의 세력이 거의 멸망하여 [[산둥성|산동]](山東)의 익도(益都)[* 현재의 [[산둥성]](山東省) 칭저우시(青州市) 일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음력 6월 15일[* 양력(율리우스력)으로는 7월 6일.], 차칸테무르는 거짓으로 항복해왔던 홍건적의 장수 전풍(田豐)과 왕사성(王士誠)에게 암살당하게 되어 승리를 눈앞에 두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왕보보에게 차칸테무르의 권한을 그대로 물려주고 계속해서 전투를 이끌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왕보보에게 '코케테무르'라는 새 이름을 하사하였다. 코케테무르는 어떠한 동요와 지체도 없이 성을 맹렬히 공격했다. 성을 공격할 때마다 사졸들의 앞에서 솔선하여 선두에서 싸웠으며, 장수들과 작전을 논할 때면 반드시 양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코케테무르는 공격하는 중에 적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분노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적들은 그런 코케테무르를 몹시 두려워하여 온 힘을 다해 성을 막았다. 적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코케테무르는 공격의 방법을 바꾸었는데, 장교와 병사들을 시켜서 성 주위에 대대적으로 땅굴을 파 익도성의 내부와 통하도록 하고는 그 굴로 침투하여 적들을 공격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코케테무르는 음력 11월 4일[* 양력으로는 11월 20일]에 익도성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전풍과 왕사성은 성이 무너지자 그대로 코케테무르에게 살해당했고, 두 사람을 따르던 부하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코케테무르는 싸움에서 이긴 뒤 차칸테무르의 제삿상을 차리고 그 위에 전풍과 왕사성의 심장을 각각 도려내어서 바쳤다. 끝까지 익도를 지켰던 홍건적의 수장(守將) 진노두(陳猱頭)와 패잔병 200여명은 모두 몸을 포박하고 형구(刑具)를 채운 뒤 조정으로 압송하였다. 이렇게 복수를 끝낸 코케테무르는 익도에 호응하여 배반했던 거주(莒州)[* 현재의 산둥성 [[르자오시]](日照市) 쥐현(莒縣)]도 마저 공격하여 무너뜨리니 이로써 산동 지역의 홍건적들은 온전히 평정되었고, 코케테무르는 산동을 지킬 수비군을 배치한 뒤 1363년 2월에 하남으로 귀환한다. 그렇게 [[중원]](中原)의 홍건적들이 모두 평정되자 원은 잠시나마 평화를 되찾는 듯 했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본거지로 돌아간 코케테무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회를 노려 코케테무르의 세력권을 빼앗으려는 양아버지 차칸테무르의 숙적 '''[[베이르테무르#s-3|베이르테무르]]'''였고, 두 사람의 격돌은 나라를 멸망하게 만드는 거대한 내전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