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리굴라/생애 (문단 편집) ==== 내정 ==== 칼리굴라의 공공개혁과 공공 인프라 증설은 서기 38년과 서기 39년 연이어 진행됐다. 38년 아퀼리우스 율리아누스와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집정관이 된 이후, 가이우스는 인기영합정책으로 1퍼센트의 경매세를 폐지했으며, 화재 피해자들에게 개인국고를 통해 시혜를 베풀었다. 따라서 37억 세스테르테우스나 되는 티베리우스의 유산은 칼리굴라의 무절제한 소비로 인해 곧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말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가 남긴 2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낭비했고, 후일 조카인 네로는 이런 외삼촌의 화끈한 국고 탕진을 매우 부러워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달리, 현대에 이르러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가 주장한 소위 국고 위기는 서기 38년 벌어지지 않았고 네로 역시 이런 말을 후대의 [[콤모두스]], [[엘라가발루스]] 같이 완전히 무능한 암군과는 결이 다른 황제라서 이런 발언을 농담으로도 한 적이 없다. 이는 다음해(서기 39년) 국고 위기가 시작됐을 것이라고 추정한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 세네카의 주장도 상황이 비슷한데, 디오의 주장은 수에토니우스의 것처럼 21세기 들어 로마 제국의 국고 상황, 지출 내역 연구를 통해 과장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가령 앨스턴의 발표에 따르면 칼리굴라 암살 직후,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근위대 병사 개인에게 각각 지급한 15,000 세스테르티우스가 나온 곳이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에게 상속받은 그 금액 중 극히 일부였다고 한다. 이는 앳킨슨의 설명도 비슷한데 로마 제국 재무부와 화폐주조국의 귀금속 각출 및 국고 관리상 두 고대 기록의 설명은 거짓임이 단번에 드러나며, 세네카가 말한 칼리굴라의 공공 곡물마차, 곡물선 압류 역시 로마 제국의 기근 대처 명령 중 가장 일반적이고 오래된 방법이라서 칼리굴라가 벌인 실책으로 폄하하는 것은 세네카 스스로 제 얼굴에 침 뱉는 격과 같다고 한다. 이런 연구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 역시 클라우디우스가 41년 등극했을 때 프라이토리아니 병사 개개인에게 일시금으로 지불한 금액이 칼리굴라 소유의 황제 금고였음을 직간접적으로 적고 있어 오늘날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 유증금을 다 쓰고 국고를 거덜내면서 재정위기를 초래했다는 주장은 세네카, 수에토니우스 그리고 두 사람의 기록을 그대로 적은 디오의 기록 중 대표적인 흠집내기로 평가받는다. 어쨌든 가장 유명한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서기 38년부터 돈을 펑펑 쓰면서 국고를 거덜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반성하지 않고 다음부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원로원을 협박했고 대중들에게 나라에서 국고 자금을 대출해줬다고 한다. 헌데 이 주장 역시 오늘날 의심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칼리굴라는 과격하고 냉혹하고 어딘가 미숙해보여도 매우 정치적이고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머리가 좋았던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칼리굴라의 자금 대출에 관하여, 황제와 황실 차원에서 법적 이자 이하의 저금리 대출을 통해 재위 초반부에 인기몰이를 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해, 그는 여세를 몰아 민회를 형식적으로 부활시킨다. 이를 통해 가이우스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를 통해 원로원을 견제했다. 또 그는 로마 제국 내에서 황제를 보좌하는 관료층을 보강하면서[* 이 무렵,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법무관 자리까지 연이어 승진한 대표적인 [[기사계급]] 출신이 [[베스파시아누스]]였는데, 그는 고리대와 경매업에 종사한 탓에 가문의 평판이 좋지 않음에도 칼리굴라 시대때 법무관에 추천받아 취임했다고 한다.] [[기사계급]]에 본격적으로 [[속주]] 출신 로마 시민권자들을 채워넣었는데, 이런 그의 방식은 후임자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가속화됐다. 칼리굴라는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일대로 공급되는 곡물 수급을 위해, 대대적으로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여러 항구들을 건설, 보수했다. 이는 이탈리아와 갈리아 일대로 이집트 곡물들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 등지에 중점적으로 건설하도록 했다. 이 조치는 재정적으로 무리로 보였는데, 칼리굴라를 크게 좋아하지 않은 요세푸스는 "재정적으로 무리처럼 보인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항구 건설들은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곡물 수급을 증대시키고, 기근을 해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세네카는 이에 관해 칼리굴라가 상당히 많은 돈을 쓰고 대부분 예산을 로마, 이탈리아, 갈리아에 집중해 이 문제로 상당히 골치를 앓았다면서, 돈을 펑펑 썼다고 말한다. 이는 세네카를 비롯한 로마인(특히 원로원 의원 출신 인사들)의 기록을 추합해, 자신의 생각을 적은 디오 카시우스도 비슷했는데, 디오는 "가이우스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거의 모든 돈을 썼고, 어떤 식으로든 세금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 자금을 모았다."면서 가이우스가 이탈리아와 로마, 갈리아 발전과 게르마니아 발전 투자에 돈을 쓴 까닭에 그가 이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어 힘들어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외에도 칼리굴라는 불안정한 프린켑스 귄위 향상을 위해 내정 전반에서 조금씩 변화를 꾀했다. 현대 연구들의 발표에 따르면, 칼리굴라의 내정 개혁은 놀랍게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비슷하면서 후기 로마의 전제군주정의 모습을 일정부분 띠고 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제정한 재정 행정 개혁 및 사법 행정 부분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사법 행정 쪽에서 칼리굴라는 원로원을 견제하면서, 자신과 율리우스 가의 권위 신장을 추진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시대동안 유명무실해진 민회 집회를 허용하면서 아우구스투스처럼 자신이 치안판사를 맡고 원로원을 견제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또 그가 원로원에게 빼앗은 각종 임명권과 발행, 통제 권리 역시 사후에도 로마 황제들이 원로원과 파워게임을 하거나, 황제가 개입을 통해 시급한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무작정 칼리굴라를 폭군으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증거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