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레 (문단 편집) ===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하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가?' 칼레가 잉글랜드에 함락된 것은 [[1347년]]. 백년전쟁이 끝난 것이 [[1453년]]인데, 프랑스의 칼레 탈환은 [[1558년]]에야 이루어졌다. 즉 백년전쟁이 끝나고 백년도 더 지나 탈환했고, 칼레가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은 기간은 2백 년이 넘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를 프랑스가 칼레 회복에 관심이 없었다거나 역대 프랑스 왕들이 게으르고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서는 극히 곤란하다. 당장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만 하더라도 맞수인 [[카를 5세]][* 친가가 신성 로마 제국 황가이고 외가가 스페인 왕가인 희대의 엄친아다. 즉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에, 베네룩스 지방, 구(舊) 아즈텍 및 잉카 제국령까지 통치했으니, 군사적으로 밀리는 게 당연.]에게 군사적으로 밀려서 그렇지 [[문학]], [[건축]], [[그림]], [[언어]], [[교육]] 등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다. 또한 프랑수아 1세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프랑수아의 [[선왕]]이자 [[장인어른|장인]]인 [[루이 12세]](재위: 1498~1515)도 내정을 훌륭하게 관리한 왕이다. 치세 동안 단 한 차례의 [[반란]]도 경험한 바 없고, [[1506년]]에 [[투르]]에서 개최된 [[삼부회]]에서는 '[[국부|국가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 또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루이 12세의 프랑스가 연거푸 전쟁[* 2차 및 3차 이탈리아 전쟁.]에 참가하면서도 재정난을 겪지 않은 것에 대해 루이가 평소에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렇듯 훌륭한 왕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하지 못한 것은, '탈환하지 못한 게 아니라, 탈환하지 않았던 것' 이라는 데에 그 해답이 있다. 백년전쟁을 끝낸 프랑스 왕 [[샤를 7세]](재위: 1422~1461)는, 전후 복구 사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선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아들로 뒤를 이은 [[루이 11세]](재위: 1461~1483)는 [[왕권]] 강화야말로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왕실 방계임에도 아예 독자세력화하려는 각을 보는 [[부르고뉴국]] 등 자신의 앞길을 막는 귀족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와 연계하려 하자 잉글랜드에 급히 배상금을 보내 프랑스 국내의 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칼레를 돌려주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 그리고 루이 11세가 세상을 떠난 뒤 프랑스는 [[이탈리아 전쟁]]이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땅따먹기 경쟁을 벌였고, 물론 백년전쟁과 관련한 상징성은 있지만 평범한 도시에 불과했던 칼레를 탈환하기보다 [[경제]]와 [[문화]]의 보고(寶庫)인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부터 칼레를 탈환하기까지의 [[1558년]] 동안의 백년 동안 프랑스는, 국내 [[귀족]] 세력을 꺾어누르고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칼레 문제를 잠시 미루어 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