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레 (문단 편집) === [[프랑스]]의 탈환 === 결론부터 말하면,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하게 된 것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노라고 작정한 결과라기보다 어쩌다 보니 탈환했다고 하는 쪽이 사실에 가깝다. [[1494년]] 이래로, 프랑스는 [[스페인/역사#s-3|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과 [[이탈리아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문화, 경제적으로는 더 없이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누어져 [[군사력]]은 허약하기 그지없는[* 프랑스나 스페인 등이 볼 때.] 상태로, 결과적으로 프랑스나 스페인 등이 볼 때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었기 때문. 하지만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연합[* [[카를 5세|군주]]가 [[동군연합|한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부분 참고.]에 번번이 밀리고 있었고, 백년전쟁 때 프랑스 내에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도 프랑스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신성로마제국-스페인과 함께 간간이 프랑스를 공격했다. 그러던 [[1558년]] 8차 이탈리아 전쟁(1551~1559) 중에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칼레 공격을 명했다. 이 [[명령]]엔 잃어버린 영토 회복이라는 목표도 물론 있었지만, 당시의 프랑스로서는 스페인의 동맹으로서 자신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잉글랜드의 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메리 1세]]는 의회가 결사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고[* 펠리페가 메리보다 ''열한 살 아래''였다. 또 한참 전의 일이긴 하지만 한때 펠리페의 아버지 카를과 메리의 혼담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에 따라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국왕]]과 [[의회]]의 사이가 삐걱거리는 [[상황]]에서 [[전쟁]] 따위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이에 앙리는 잉글랜드부터 확실히 꺾어버리고 스페인과의 최종 결전에 임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칼레를 공격하는 프랑스군의 수가 2만 7천에 그 지휘관은 이탈리아 전쟁 후반기 프랑스 최고의 맹장(猛將)인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로렌(Francis de Lorraine II, Duke of Guise)이었던 데에 비해[* 여기에서 프랑스사에 밝은 분들은 기즈 공작이라고 하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배후조종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겠는데, 프랑수아 사후 그 직위는 아들 앙리에게로 이어졌다. 다만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프랑수아 역시 위그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위그노 전쟁 중 위그노 측에 의해 암살당했다.], 잉글랜드 측의 수비군은 꼴랑 2천 5백 명에 불과했다. 당시 칼레의 수비군 대장이었던 토머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는 일찍부터 [[프랑스군]]의 공격을 내다보았던 터라 잉글랜드 본국에 증원군을 요청했지만, 2백년 동안이나 잉글랜드령이었던 도시가 쉽게 함락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탓인지 국왕과 의회의 갈등 때문인지 잉글랜드는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으로 일관했다. 아니나 다를까 칼레는 공방전이 시작된 날로부터 '''일주일도 채 못 되어 함락당하고 만다.'''[* [[1558년]] [[1월 1일]] ~ [[1558년]] [[1월 6일]].] 칼레 탈환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꽤나 기뻐했던 모양이다. 같은 해 [[1월 23일]]에 친히 칼레에 입성하여 프랑스 영토임을 선언했던 것인데, 당시의 [[통신]]이나 [[교통]]을 생각해보면 탈환 소식을 받자마자 칼레로 향했던 듯. 또한 앙리는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지방행정조직을 재편하여 칼레를 정식 영토로 수복하는 후속조치를 완료했다. 하지만 칼레 탈환 이후의 '스페인과의 결전' 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칼레 함락 이후 앙리는 프랑수아 드로렌에게 곧바로 [[룩셈부르크]]로 진격할 것을 명하는 한편 폴 드테르메(Paul de Thermes)에게 [[군대]]를 주어 [[베네룩스]]로 진격하게 했는데, [[1558년]]의 그라블린 전투(Battle of Gravelines)에서 폴 휘하의 군대가 [[네덜란드]] 출신의 [[지휘관]]인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 판에흐몬트(Lamoral van Egmont, Count of Egmont)에게 개박살[* 만 4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만 2천 5백이었던 데에 비해, 만 8천 스페인군의 사상자는 겨우 3백. 이건 여담이지만 이후 라모랄은 네덜란드의 종교(신교) 문제로 인해 반역죄로 처형당했는데, 그것이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앙리는 할 수 없이 이듬해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 이탈리아 거의 대부분이 스페인 영토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이탈리아의 역사가 안 나오는 게, 바로 이 때문. 르네상스 이후 통일 이전까지, 이탈리아는 그 대부분이 줄곧 스페인.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잉글랜드는 칼레 함락이라는 소식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프랑수아 드로렌의 배려로 살아남은 휘하 병사들과 함께 잉글랜드에 무사 귀국한 토머스 웬트워스는 곧바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는데, 그 죄목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반역죄'''. 일찍부터 지원군을 거듭 요청했던 토머스의 입장에서는 심히 억울한 일이었을텐데 다행히도 머지않아 무죄 석방됐다. 웬트워스는 20여년 뒤인 [[1584년]]에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의회에서는 "거 봐라. 스페인 놈을 [[남편]]으로 맞아들이지 말랬더니 끝끝내 결혼해 가지고서는 이게 뭔 일이냐"라는 비난이 높아졌던 듯하다.[* 실제로, 메리 1세가 결혼 상대를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때문이었는지 칼레 함락 이전부터 병상에 누워 있던 메리는 신하들에게 "짐이 죽어서 해부된다면, 그대들은 짐의 심장에 펠리페와 칼레라는 두 단어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칼레의 함락과는 전혀 무관했는데도 엉뚱하게 피해를 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메리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를 꼽을 수 있다. 메리 1세의 실정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잉글랜드 의회 의원들 사이에 "[[성차별|역시 여자 따위가 왕이 되니까]]..."라는 생각이 퍼졌다. 그리고 메리의 뒤를 이어 또 다시 여왕이 즉위하자 의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어서 빨리 결혼하시어 정치라는 [[여자]]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운 짐을 하루빨리 내려놓으소서"라고 계속해서 요구했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는 [[성별]]이 왕으로서의 자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