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타리파 (문단 편집) === 소수설 === 일부 개신교계에서는 알비파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주교제와 제국교회의 성사 발전과정을 거부한 고대 교회의 후예로 본다. 카타리파는 7성사 이전의 교회 방식을 보존한 자들이며, 가톨릭이 이단으로 규정지은 보고밀파/바울파, 이탈리아북부의 발도파와 일치를 이룬 성직제도를 거부한 고대 교회의 후예였다고 보는 것이다.[* 피에르 발도는 발도파의 창시자가 아니라 이들에 합류한 리옹 일대의 집단의 지도자로 본다.] 이는 이탈리아 개혁교회가 된 발도파 교회들, 프랑스 개혁교회 등의 입장이며 국내에서는 성서침례친우회, 일부 장로회 인사들이 주장한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기욤 파렐의 평전에서도 해당 내용이 나온다. [[https://m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41768694?cat_id=50005640&frm=MBOKPRO&query=%EA%B8%B0%EC%9A%A4+%ED%8C%8C%EB%A0%90&NaPm=ct%3Dlkl8aikw%7Cci%3D517fea17da4b7fb8e5c7cf71a7f8075e569c0acc%7Ctr%3Dboknx%7Csn%3D95694%7Chk%3D7b68778d0394402af74086b72122519816dba483|#]]]완덕자의 존재와 성관계 및 음식에 관한 규율 등은 이들을 마니교로 몰려 한 왜곡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담은 국내에 번역되거나 출판된 도서들은 링크 참조 [[https://m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45157173?query=%EC%B0%B8%20%EA%B5%90%ED%9A%8C&NaPm=ct%3Dljiiwpqg%7Cci%3D6ca74908a1cb4a1e6e09eb75c3fa215fe68fe9f6%7Ctr%3Dboksl%7Csn%3D95694%7Chk%3D8ecf539190103918509ff0e2885d02dd54abfac2|1]],[[http://mitem.gmarket.co.kr/Item?goodsCode=1501645876&jaehuid=200013509|2]],[[https://m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3435298036?cat_id=50005640&frm=MBOKPRO&query=%EA%B8%B0%EB%8F%85%EA%B5%90%ED%9A%8C%EC%82%AC%EC%9E%85%EB%8B%88%EB%8B%A4&NaPm=ct%3Dljiiz6gw%7Cci%3D93f2d23fdcfc5be3161185e50bb4d5bf8b314d43%7Ctr%3Dboknx%7Csn%3D95694%7Chk%3D414dc913fb7da8287c544105fc93e11f2f5d27e5|3]] ] 이러한 관점에서는, 알비파는 '제도 교회'로 표현되는 가톨릭과 대비되는 '영의 교회'가 되며,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영의 교회'가 다시 빛을 본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개신교 내부에서도 다수설이 아니며.[* 당장 위의 각주에서 소개된 세 책들만 하더라도 학술서가 아니며, 한 책은 아예 안식교의 책이다.] 오히려 '고대 교회 - 알비파 - 개신교'로 연결되는 역사성을 만들어내려는 강력한 목적성을 갖춘 왜곡이다. 알비파와 비슷하게, 제도 교회를 적대시하는 영성 중심의 분파들은 교회사에서 여럿 있었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하나의 분파인 이들을 16세기 이후의 교회사에 맞춰서 '개신교 역사'로 소급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사가들은 개신교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로,[* 심지어 칼빈의 경우도, 이단의 대명사로 카타리를 그의 저술에 쓰기도 했다. 소수설과 동일한 주장을 펴던 이탈리아 피에르몽의 발도파와 협력하던 기욤 파렐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혹은 더 올려잡아도 [[후스파]] 정도로 잡지 '참 교회'가 어둠 속에서 1500년쯤 이어졌다는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 또한 개신교 신학에서는 가톨릭식 주교 제도가 성경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보지만, 합법성 논쟁과는 별개로 역사학적으로는 '주교 1명이 교구를 이끄는 단독지도체제'가 늦어도 2세기엔 이미 통용되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