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자크 (문단 편집) === 돈/쿠반 카자크 === ||[[파일:From the history of the Cossacks.jpg|width=100%]]|| || 인포그래픽: 역사 속의 카자크 || ||범례 '''┅''' 1900년 러시아 제국의 국경선 {{{+2 {{{#bbd99f ■}}}}}} 카자크의 정착지역 {{{#0039a6 1570}}} 각 카자크 군단의 창설연도 [br]카자크인 인구수 [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bd99f; font-size: .9em" {{{#000 '''러시아 제국(1897년)'''}}}}}} : 2,928,842명(전체 인구의 약 2.3%)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8dec7; font-size: .9em" {{{#000 '''러시아 연방(2002년)'''}}}}}} : 140,028명(전체 인구의 약 0.09%) || || [br]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인물설명: 돈 카자크인 * 군모: 모자를 잃어버리면 큰 치욕으로 간주 됨 * 견장 나이 또는 부상 정도에 따라 달라짐 * 채찍 말에 사용하는 짧은 채찍 * 줄무늬(바지의 재봉선) 1801년에 재정됨 * 군도 ---- * 14-17세기에 카자크는 (러시아 정부 등과) 계약을 통해 형성된 군사집단이었다. * 18세기 경에 카자크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러시아 제국의 특수한 군사집단으로 변모했다. * 20세기 초엽에는 11개의 카자크 군단이 존재했다. * [[러시아 혁명|1917년에 발생한 혁명]] 이후 카자크 탄압 정책으로 카자크는 대부분 사멸했다. * [[소련 붕괴|1980년대 후반]]부터 카자크(문화)를 부흥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다. 정부는 1990년에 카자크인의 지위를 보호하는 법안들을 도입했다. ---- 20세기 초엽 카자크의 재정착지역(창설연도 순) * 돈 카자크(1570) * 오렌부르크 카자크(1574) * 텔레크 카자크(1577) * 우랄 카자크(1577) * [[시비르 칸국|시비르]] 카자크(1582) * [[바이칼 호수|자바이칼]] 카자크(1655) * 쿠반 카자크(1696) * [[아스트라한]] 카자크(1750) * 세미레치옌스크 카자크(1852) * [[아무르 주|아무르]] 카자크(1855) * [[우수리]] 카자크(1865) || }}} [br] || 돈 카자크, 또는 쿠반 카자크는 오늘날 [[러시아]]의 카자크들이다. 이들 또한 형성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코자키처럼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들어갔고, 형성 시기도 특정한 시기로 구체화시키기 어렵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대공국]]과 여러 공국이 사라지고 몇몇 [[슬라브]]인들이 [[캅카스 산맥]] 북쪽 즉 남부 러시아 [[스텝(지리)|스텝]]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반유목화가 된 것을 기원으로 하거나, 몽골제국에서 떨어져 나간 [[타타르]]인들이 키예프 대공국이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한 이후 이곳에 내려와 살던 슬라브인들과 만나 통혼하는 과정에서 슬라브화되어 카자크를 형성했을 것이란 학설도 있다. 아마 카자크 집단의 기초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의 [[민족]] 그룹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들 외에도 예카테리나 여제의 헤트만국 해체 이후 드네프르강 유역의 카자크들이 더 동쪽의 돈강 유역 이주하였는데 이들 역시 돈 카자크 집단의 형성에 중요한 요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주류 러시아인과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했고, 러시아 근현대 역사의 여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군 또는 소련군 소속의 정예 기마 군사집단으로 명성을 떨쳤다. [[14세기]]에 돈 카자크의 모태가 되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는데, 이들 돈 카자크들은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에게 돈강의 [[성모]] [[이콘]]을 바치고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 칸에게 대항해 함께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타타르]]에 대항한 슬라브족의 본격적인 첫 번째 반기라고 할 수 있는 쿨리코보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이들 자유인 집단은 드니프로강에서 더 남쪽에 있는 크림 반도의 크림 타타르([[크림 칸국]])의 위협에 직접 노출되어 있었다. 킵차크 칸국은 돈스코이 대공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이반 3세]]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독립을 선언한 때부터 세력이 상당히 약화돼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이 되기도 한 크림 칸국은 [[18세기]] 이전까지 러시아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그러다가 15세기부터 정식으로 [[러시아군]]에 합류해서 현재까지 러시아 또는 러시아군에 충성을 바쳐왔다. 이들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에 앞장섰고, 시베리아의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이반 뇌제]] 시기에 이루어진 '예르마크'의 동방 원정으로, 예르마크는 전사했지만 [[시비르 칸국]]은 수도 [[튜멘]]도 잃고 마지막 칸 쿠춤이 살해되어 멸망했다.[* [[레프 톨스토이]]가 예르마크의 원정을 다룬 단편 《예르마크》를 쓰기도 했다.] 이들의 광속과 같은 확장은 [[러시아 제국]]이 편하게 시베리아 개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굳이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이루어진 카자크의 [[야쿠츠크]] 개척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야쿠츠크]]의 연교차는 약 섭씨 100도이다. 야쿠츠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헬게이트]]다. 표트르 이바노비치 베케토프와 그의 동료 카자크 30명은 [[서유럽]]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그보다 훨씬 혹독한 야쿠츠크 지역을 개척해냈다.[* 이거 가지고 해마다 몇만 제곱킬로미터를 개척했다는니 오버하는 서술이 자주 보이지만 애초에 시베리아 개척이라는 것이 사실상 수십~수백 킬로미터마다 마을을 한 개씩 만들면 촘촘한 편이었고, 대부분 특정한 지역에 도달한 후 차르의 영토임을 선포하는 식인 걸 감안한 무리수다. 그렇다쳐도 시베리아 개척이 쉬운 일이란 건 아니었다.] 또한 포야르코프, 데지뇨프, 아르라소프 등 다른 카자크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사할린]], [[오호츠크 해]], 서[[태평양]] 연안 등이 러시아 제국의 지도에 추가됐다. 덕분에 러시아 정부는 모피 무역에서 높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개척의 대가로 [[선물]], [[빵]], [[무기]], [[화폐]]를 줬다고 한다. 이 시기에 지간스크, [[베르호얀스크]], 자시베르스크, 스렛네콜림스크와 같은 도시들이 생겼다. 현지 박물관에선 이런 문건이 있다. >"12월 25일, 위대한 황제 [[미하일 1세|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온 나라에 선포하노니, 짐은 위대한 황자와 국가를 위해 종이 된 이들과 함께 레나 강가에 도시를 세웠다. 짐이 오기 전, 레나강과 야쿠츠크 땅엔 다른 도시가 없었다. 나 표트르는 [[야쿠츠크]]의 왕 마미코프의 진영 앞에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아무르강|흑룡강]]을 배를 타고 내려와 [[청나라]] 군대와도 전투를 벌였으며, 조선 [[효종(조선)|효종]] 때 [[나선정벌]]에서 [[조선군]]과 맞붙기도 했다. 카자크는 [[선박|배]]도 잘 탔다. 시베리아 •서를 왔다갔다하려면 종으로 흐르는 [[예니세이강]], [[레나강]] 등 큰 강과 지류들을 드나들어야 했다. 그러나 카자크들의 영토 확장에는 잔혹한 일면도 뒤따랐다. 카자크들은 영토 확장 과정에서 식량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베리아에 살던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문제를 일으켰다. 카자크들이 원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사적으로 착취하고 노예로 삼는 등,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영미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학살했듯, 러시아는 카자크를 앞세워 원주민을 학살하고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정복한 셈이다. 제국 정부는 카자크와 [[시베리아 원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골머리를 썩혔고, 19세기 중엽에야 간신히 화해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 초창기엔 [[볼가강]] 강가에 볼가 카자크가 생성됐으며, 후에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18세기부터 [[캅카스]]의 테레크 카자크, [[우랄]]의 야이크 카자크, [[바이칼호|바이칼]] 카자크, [[우수리스크|우수리]] 카자크, 시베리아 카자크 등이 더 형성됐다. 이들 중 [[캅카스]]나 더 밖의 지역으로 진출한 카자크들은 그곳의 타민족, 특히 캅카스의 산사람들이나 여타 무슬림들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카자크인들》의 '테레크 카자크'가 대표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GuxlAhu-gA|테레크 카자크의 무곡(舞曲). 캅카스 문화적 요소가 뚜렷하다.]] 한편 정부와의 협력이 더 많아지는 동시에 정부와의 갈등도 심해져 갔다.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코자키와 [[폴란드]]와의 관계처럼 종교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이 당시 대다수 카자크들은 '[[고의식파]]'라고 불리는 '전통의식파 정교회'를 믿었기에, 아예 다른 종파인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만큼은 아니었지만, 주류 러시아와도 종교적으로 차이가 좀 있긴 있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카자크들 덕분에 영토를 확장하고 우수한 기병대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카자크들의 활동으로 고의식파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은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제국 정부는 카자크들을 전례를 바꾼 정교로 개종시키려고 애썼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자유의 제약이 점점 강해지고, [[농노]]들이 계속 카자크 마을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자, 카자크의 특권 중 몇 가지가 박탈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이 더 많은 봉사와 의무 이행을 요구하면서 자유로운 생활, 관습과 그 의무가 충돌하며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스만 제국|튀르크]]와의 관계도 갈등의 핵심 요소였다. [[러시아]] 정부는 튀르크와 분쟁을 사서 겪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자치권이 있는 카자크들은 튀르크를 매우 혐오해 자신들 마음대로 국경 지대를 침범하고 약탈하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이걸 러시아 정부는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자유에 제약이 계속 심해지자, 많은 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정부와의 협력이 본격화된 17세기와 18세기 러시아 역사에서의 거대한 봉기는 카자크 주도하에 일어난 봉기에 농민 봉기나 다른 봉기가 함께 엮이면서 거대화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스테판 라진]][* 스텐카 라진이라고도 한다.], 불라빈, 그리고 황제를 참칭했던 [[예멜리안 푸가초프]]의 봉기가 있다.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대위의 딸]]》을 집필했다. 어쨌든 많은 저항이 러시아 정부에 의해 진압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카자크는 차츰 러시아 사회에 흡수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카자크의 자유는 계속 축소됐다. 불라빈의 봉기 이후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코자키와 마찬가지로 돈 카자크의 자치는 소멸됐고, [[푸가초프]]의 난으로 반란의 주역이던 야이크 카자크는 '우랄 카자크'로 개칭됐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많은 전쟁에 동원돼 그 용맹을 떨쳤다. [[러시아]] [[차르]]의 근위대로 활약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차르는 카자크로부터 '카자크의 대수령' 칭호를 받아 겸임했다. 고용된 카자크는 그 대가로 황제의 친위세력으로서의 많은 혜택을 받아 그 숫자도 120만 명까지 늘어났다. 이런 배경으로 황제의 명령을 받아 [[체첸]]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다른 열강과의 싸움에서도 돈 카자크는 그 진가를 발휘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그리고 특히 1812년, 러시아를 침략한 나폴레옹에 맞서 조국전쟁이 시작됐을 때, 카자크의 용맹성과 잔혹성은 같은 대불 동맹 연합군의 지휘관들도 학을 떼게 할 정도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은 >"카자크는 존재하는 모든 경기병 중에서 최고이다. 내가 그들을 우리 군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 [[1800년대]] 중엽을 지나면서 카자크 간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원래 카자크는 모두가 평등하게 땅을 경작했고, 누가 더 높은 계급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이 없이 모든 구성원이 평등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여러 차례의 농민 봉기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카자크의 자유로운 기질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을 군대식으로 서열화했고[* 1775년 예카테리나 2세가 돈 카자크와 이웃한 자포리자 코자키의 시치(Січ)를 해체한 것도 이런 조치의 일환이었다.] 여러 특권을 박탈하는 대신 카자크의 상층부를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카자크들이 황제의 호위병 역할을 해주고, 많은 전쟁과 전역에 꾸준히 참여하자 카자크들에게 주어지는 토지가 급격히 늘어남과 동시에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이 발표되면서 계층 분화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1861년 <농노 해방령>이 시행되면서 해방된 농노 출신들이 카자크인이 보유한 비옥한 남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돈바스, 캅카스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대거 이주하였다. 이들은 '이노고로드니예'(Inogorodnie)[* иногоро́дн|ий, [[https://dict.naver.com/rukodict/#/entry/ruko/d88200e43a6d473c956853455fb83dc1| ]] 문자적으로는 '다른 지역 출신' 이라는 뜻. 카자크 지역에 사는 비 카자크 농민(주로 러시아계나 우크라이나계)]라 불렸고 카자크인 지주들의 소작농이나 농번기에 품팔이로 생계를 어렵사리 꾸려나갔다. 혁명 직전인 1917년을 기준으로 남부 러시아의 이노고로드니예의 94.8%는 어떤 토지도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 Vladimir A. Zolotov and Aleksandr P. Pronshtein, ''Za zemliu, za voliu'':Iz isorii narodnykh dvizhenii na Donu (Rostov: Rostovskoe knizh, izd., 1974) pp214] 카자크 촌으로 과거 [[농노]]였던 사람들이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몰려오자 비 카자크 농민도 카자크 마을의 중요한 구성원이 됐다. 19세기 후반이 됐을 때, 카자크 마을엔 이미 카자크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나 [[바시키르인]], [[타타르]]인과 같은 여타 민족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이 같은 인구 유입의 결과, 남부 러시아에서 카자크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이 되면 돈-쿠반 일대에서 카자크인은 전체 인구의 약 43% 수준이 되었다.[* Semen S. Khromov, ''Grazhdanskaia voina i voennaia interventsiia v SSSR'':Entsiklopedia (MOscow:Sovetskaia entsiklopediia, 1983)] 이들은 상층 카자크의 토지를 경작하며 하층 카자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카자크들은 이주민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군사용 토지를 임대해줬고, 그 대가로 받은 임대 수익을 실용적으로 썼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제정 러시아의 중앙집권화와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비 카자크인 뿐 아니라 카자크인 내부에서도 빈부격차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토지를 넓게 경작하는 부유한 카자크들과 적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토지가 없는 가난한 카자크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카자크인들의 본거지인 남부 러시아에서는 인구의 상위 25%가 전체 토지의 75%를 소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으로 토지 분배와 계층 분화가 일어나긴 했지만, 돈 카자크들은 다른 러시아 농민들보다는 훨씬 여건이 좋았다. 카자크들은 원래부터 자유민들이었기에 대다수 러시아 농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농지와 목초지 부족 문제, 토지 상환금 납부 문제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카자크 마을이 가진 토지 안정성은 다른 유럽 러시아 지역의 농민 마을들보다 훨씬 높았다. 또한 카자크들은 대개혁 이후에도 러시아 가축 시장의 큰 손으로 군림했으며, 마을에선 상품 작물 재배와 와인 주조 등 상업적 농업이 성행했다. 그리고 카자크 마을은 대개혁 이후에도 그 규모가 축소되지 않았기에 카자크들은 대개혁의 충격을 잘 견뎌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빈곤한' 카자크인들은 비 카자크 농업 노동자(이노고르도니예)나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는 경제적 여건이 양호했다고는 해도 현실에 대한 불만과 환멸이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카자크를 충분히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 내에서 민중들의 항거가 계속되고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 운동, 반봉건 운동이 널리 퍼지게 되자 카자크는 시위 진압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떠올랐다. 특히 1905년의 1차 러시아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말을 타고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러시아 민중들에게 각인됐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의 카자크들이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으로 그려진 건 우연이 아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 내전|러시아에 볼셰비키 지지파인 적군과 황제, 멘셰비키, 입헌민주당 지지파인 백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카자크들도 둘 중 하나의 세력을 선택해야만 했다. 원래 공동생활을 하던 카자크도 이때쯤이면 계급 분화가 어느 정도 벌어진 상태였고, 남부 러시아에서 카자크인 사회는 백군과 적군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대립했다. 대체로 귀족 계급 및 사회 상류층 카자크인은 반혁명군 편에, 빈농 계열 카자크인들은 소비에트 편에 섰다. 남부 러시아의 카자크인 및 카자크인 사회에서 같이 살던 이노고르도니예 출신들은 내전기간 동안 백군과 적군 양측 기병전력의 핵심이 되었다. 카자크의 대추장 아타만을 비롯한 여러 상층부는 백군 기병대로 활약했고, 계층 분화로 인해 하층민에 속하던 카자크는 많은 수가 [[세묜 부됸니]] 원수 휘하의 적군 기병대로 들어가 활약했다. 이 시기에 러시아인뿐만이 아니라 카자크간의 동족상잔이 자행됐다. 러시아 내전의 연장 선상에서 발발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선 카자크의 오랜 숙적이자 카자크와 함께 유럽 대륙 기병대의 투톱을 자랑하던 [[폴란드]] 기병대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내전은 끝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소비에트 정권]]의 승리로 끝났고, 패배한 백군 측의 카자크는 대부분 백군들의 말로가 그렇듯이 외국으로 망명하든, 추방당했든 결국 러시아를 떠났다.[* 미국으로 간 이들이 [[미국]]의 '돈 카자크 합창단'을 이뤘다.] 이 시기의 좌•우 갈등으로 쉴 새 없이 죽어나간 카자크들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으로 《고요한 돈강》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멜레호프는 카자크족 빈민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이 벌어지자 계속 백군과 적군을 오락가락하면서 좌•우 갈짓자 행보를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혁명에 휘말린 카자크족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이 책의 저자 '미하일 숄로호프'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이 작품은 [[1950년대]]에 컬러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냉전]] 말기에 소련 영화 수입금지가 풀리자 비디오로 출시됐다. 사람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대륙의 기상|소련에서 만든 영화답게]] 크고 웅장한 스케일에 [[CG]] 없이 그냥 사람들을 동원했다. 참고로 이 책은 서슬이 퍼렇던 스탈린 시절에도 높이 평가받았는데, 주인공의 갈짓자 행보 때문에 공산당 측에서 많은 비판을 했음에도 워낙 문학성이 뛰어나서 숄로호프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일단 내전기 카자크는 굉장히 복합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다. [[미국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란 [[러시아 혁명]] 르포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보여준 카자크관과도 너무 다르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따르면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는 "토지없는 카자크들", 즉 빈농 계열 카자크들이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만들어 [[볼셰비키]]에 합류하라고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집권시기인 [[1932]]년 스탈린이 무자비한 농업집산화와 식량 징수를 하면서 그에 대한 역효과로 [[소련]]에 대기근이 닥쳤는데, 불행히도 이 기근이 우크라이나 외에도 쿠반강 유역의 돈 카자크들에게까지 직격탄을 먹여 그 지역 인구의 2~30%가 사망했다. 이 기근은 [[우크라이나]] 전역과 캅카즈 지역 전체, 그리고 러시아 남부 지역을 덮친 것으로 그 자세한 것에 대해선 ([[우크라이나 대기근]] 참조)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 기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얼마 없는 곡식들을 빼앗아 카자크족을 죽게 내버려둘 뿐만 아니라 겨울에 많은 카자크족들의 집을 부수고 협동농장에 부역하도록 했고, 이는 많은 카자크족들이 겨울에 아사하거나 얼어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의 상황이 너무 참혹해 소련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는 스탈린에게 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레전설 작가의 청원을 어여삐 여겨 들어주는 척하긴 했지만, 결국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돈 카자크들이 소련 체제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친서방적이거나 반소적인 카자크[* 러시아 내전 이래 공산정권을 피해 고국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했거나 그대로 남아서 소련의 탄압을 받았던 경우.]와 친소적인 카자크 간의 이야기가 매우 다르다. 친서방적이거나 반소성향의 카자크들은 카자크족이 다른 불온민족들처럼[* 소련 체제에 저항한 민족들을 일컫는 말로 대표적으로 [[체첸인]]과 [[우크라이나인]]이 불온민족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민족들은 소련 내에서도 이동의 제약 및 지원이 적었으며 고위 진급 제한도 있었다. 반대로 우수 민족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제정 러시아 때부터 친러적이었던 [[오세트인]]이었다.]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소비에트 정부 수립 직후부터 카자크의 민족성과 종교를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수만명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였고,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엔 반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을 억지로 잡아다가 콜호스 등의 협동농장에 부역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강압정책으로 사망한 카자크들이 약 30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래서 소련 당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고 말한다.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반소적인 카자크 부족들 사이에서 카자크족들의 국가를 세우자는 독립사상이 생겨 저항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친소적인 카자크들의 주장은 탄압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와 탄압은 있었지만 과장된 면이 있다는 주장으로 갈린다. 친소적인 카자크들은 1936년에 카자크족의 전면적인 입대[* 이런 입대는 개별적 입대가 아니라 부락 전체가 1개 부대로 재편되는 것이다.]가 허용되면서 소련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기 및 [[소련]] 치하의 카자크에 대한 탄압은 관점의 차이에 따라 의견이 갈려서 이분법적으로 단순히 나뉠 수 없다. 카자크들마다 성향이 달랐기 때문인데 당장 차르 정권은 역사적으로 카자크들을 러시아 내부의 소수 민족이나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탄압에 특화된 내부 치안 부대로 중용했고, 이 와중에 많은 수의 카자크가 특히 돈강과 우크라이나 유역의 데니킨에서 시베리아의 콜차크까지 백군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반기까진 별 활약이 없었으나 전쟁 말기 [[말(동물)|말]]에게 초가지붕의 지푸라기를 먹여가면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바그라티온 작전|허둥지둥 내빼는]] [[독일군]]을 '''[[도검|칼]]로''' 도륙하는 용맹함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질리게 했다고도 한다. 러시아 내전 시기부터 [[소련군]] [[기병]]부대엔 카자크 출신이 많았으며, 기병 총감인 [[세묜 부됸니]] [[원수(계급)|원수]]부터 카자크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은 카자크 마을에서 자란 [[러시아인]].] 많은 카자크들이 [[나폴레옹 전쟁]] 때처럼 소련군에 복무해서 싸웠다. 산하에 카자크 [[기병]]을 부대로 둔 [[소련군]]의 [[이반 코네프]] 원수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카자크의 용맹을 묘사하면서 >"걔네들은 항복하겠다고 든 [[독일군]]의 두 손까지 잘라버리더군..." 이라고 이들의 용맹성을 묘사했다. 물론 덕분에 독일군도 카자크들에게 항복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고 있었기에 카자크들을 사로잡으면 대부분 사살했다. 카자크들이 이렇게 잔인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카자크들의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탓도 있었지만 당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집단학살을 계획적으로 진행했었고, 포로로 잡힐 시에 끔찍하게 죽을 것이란 공포감이 만연했던 이유도 있었다. [[파일:attachment/kaz.jpg|width=500]] [[1945년]] 6월, [[독소전쟁]] [[승리의 날#s-2.1|승리 기념 퍼레이드]]에서 [[붉은 광장]]을 행진하는 카자크족 부대. [[독일군]]에도 카자크가 있었다. [[나치 독일]]이 [[독소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카자크들과 전향한 보수파 장군인 [[표트르 크라스노프]]가 함께 2개 카자크 기병 [[사단(군사)|사단]]을 창설했으며[* [[소련]] 카자크는 17개 사단.] 독일인인 [[헬무트 폰 판비츠]] 장군이 지휘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했다가 후에 독일에 붙은 카자크 출신 러시아군 장군들에 호응하거나 소련의 문화적 억압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 측에 부역했는데 독일은 이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에 소련군에 대한 작전보단 후방의 [[빨치산]]을 진압하는 데 자주 동원했다. 대전 말기에 이들은 [[SS]] 15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편입됐고, 대소련 방어전에 투입됐다. 이들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 영내로 진입했고, 독일이 항복하자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자크들은 연합군에게 항복했으니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도 이런 기대를 하고, 독일이 연합군과 강화를 맺으면 그나마 소련에게 넘겨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얄타 회담으로 소련과 협의된 [[영국군]]은 이들을 몽땅 스탈린에게 넘겨버렸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호주로 도망치는데 성공한 [[이반 코노노프]] 정도다. 이 사람은 KGB의 추격도 받았으나 끝내 살아남았다가 나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교통사고로 위장한 암살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조사결과 운전도중 심장마비가 와서 사망한 것으로 판결났다.] 다만 이들 중 헬무트 폰 판비츠는 주요 지휘관들 중 유일하게 독일인이라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으나 휘하 부하들을 버리지 않고 자신도 소련으로 자진해서 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이다. 이들은 결국 넘겨지자마자 지휘관급 인물들은 모두 [[교수형]]에 쳐해졌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시대에 사면되거나 일부는 그 사면마저도 다시 취소됐다. 일례로 [[헬무트 폰 판비츠]] 같은 경우에는 소련 해체 이후 스탈린 시대의 피해자로 규정되어 다시 재판을 받았다가 전쟁범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후 번복되었다. 여기에 [[연합군]]은 소련 시민이 아니었던, [[러시아 혁명]] 당시 난민으로서 이주해 한 세대가 넘은 카자크들까지 전부 다 넘겼다. 민간인 포함 50,000명이나 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카자크 송환"(Repatriation of Cossacks), "카자크 배신"(Betrayal of the Cossacks), "린츠의 카자크 학살"(Massacre of Cossacks at Lienz)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물론 [[독일]] 편에 선 카자크들도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스탈린과 공산당은 순응하지 않는 카자크들을 포함해 반대파를 매우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을 탄압하던 공산당원들을 무찌르고 좋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들었으니 솔깃할 만도 했다.[* 당시엔 카자크 이외에도 탄압받다가 독일 편에 선 소수민족들이 많았다] 소련 입장에선 그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과 손잡은 반역자들일 뿐이었지만.~~자기네 한 짓은 생각 않고~~ [[007 골든 아이]]가 바로 이때 배신당한 카자크의 아들인 006 [[알렉 트리벨리언]] 요원([[숀 빈]] 役)이 소련과 영국을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을 다루고 있다.[* "[[제임스 본드|너]][[피어스 브로스넌|의]] 부모님은 등산 사고로 사망했지만, 나의 부모님은 배신자 영국과 도살자 스탈린 사이에서 살아남으셨다. 결국은 수치심 속에서 함께 자살하셨다."] 돈 카자크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용맹으로 [[전투종족]]의 명성을 회복했지만, 소련군이 전후 대대적으로 기계화를 추진하면서 기병 병과 부대가 모두 기계화 보병, 혹은 기갑 부대 등지로 개편되자 [[기병]] 부대 담당 카자크들은 또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카자크족 부대는 해체됐다. 이와 함께 카자크족 자치공화국도 폐지됐다. 그래서 이들은 그저 이후 [[농민]]이나 일반 [[시민]]으로 돌아갔다. 거기다 상술했듯 민간에서는 백계 카자크의 나치 부역으로 인해 충성파 카자크들도 '잠재적 배신자'로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 전역에서 카자크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1989년]] 소련 정부가 약소민족에 대한 탄압을 인정했다. [[소련 해체]] 이후 [[1992년]]에 [[러시아]]에서 억압받은 [[민족]]에 대한 복권을 보장하는 법이 제정되자 카자크 부흥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카자크에 대한 일련의 법들이 제정됨은 물론 1996년~1998년 2년 동안 10개의 보이스코(10,000명 이상일 경우)와 3개의 관구(2,000명 이상), 4개의 개별 집단이 등록됐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4만 명이 러시아에 살고 있으며 95% 이상이 러시아 남부 관구에 살고 있다. 카자크는 또한 그들의 단합과 [[문화]] 복원, [[전통]]전승 등을 위해 [[텔레비전]] 채널을 개통하거나 [[인터넷 방송]]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해 활발한 복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화센터는 물론 카자크 자체 미인대회도 열리고 있을 정도. 이런 카자크 문화 강조 노력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쿠반 카자크 합창단이다. [[유튜브]]에 동영상이 많이 있다. 특히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부 관구는 [[캅카스]] 계통의 비[[슬라브]] 거주민이 상당히 많은 지역인데, 예로부터 이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의 호전적인 기질은 유명했다. 특히 [[체첸인]]들이 악명이 높았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도 같은 처지로 그곳으로 끌려온 체첸인들에게 크게 학을 뗄 정도로.[* 그러나 의외로 고려인과 체첸인들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체첸인들이 중앙아시아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 기반을 마련했던 고려인들이 이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었다고. 이 영향으로 캅카스 지역에서 고려인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체첸 분쟁 당시 체첸 반군이 버스를 점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버스 승객 중에 있었던 고려인들만 사과를 건넨 뒤 특별히 풀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체첸인들이 유일하게 겁내는 사람들이 바로 카자크족들이라고 한다.[* 반대로 카자크족들도 체첸인들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인식했는지 남부 지역 전통 카자크 자장가엔 아기를 안심시켜서 재우기 위해 너희 아버지는 위대한 전사라서 체첸인들도 습격하지 못할 것이란 가사가 있다.] 그 영향으로 [[체첸 사태]] 당시 체첸 및 잉구세티야에 거주하던 카자크들인 테레크 카자크 공동체들은, 사태 당시 대규모 러시아인 탈출 혹은 추방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물론 아타만과 테레크 카자크 자체는 여전히 존속중이지만 그 숫자는 크게 감소했다. [[러시아군]]에서의 대우 또한 매우 좋아졌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족 대추장(아타만)에게는 원수의 계급을 수여했고, [[군인]]의 용맹을 제일로 치는 카자크족들은 다시 [[군대]]로 들어가서 [[러시아]]가 관여하는 [[전쟁]]들의 선봉에 서고 있다. [[특수부대]] 혹은 해외 원정군의 일원으로 [[체첸]] 전쟁이나,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simferopol-cossack_2845267b.jpg]]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2014년 크림 위기]] 당시 [[러시아군]] 소속의 카자크 병사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