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자크 (문단 편집) ==== 기원 및 형성 과정 ==== || [youtube(UQ_ocyTRRIE)] || 자포리자 코자키는 우크라이나 민족적 사관에서 '''[[우크라이나]]의 직접적인 뿌리'''로 여겨지는 집단이다. 그러나 이는 우크라이나의 기원은 기원불명의 경계인 집단인 코자키보다 더 오래된 [[키예프 루스]]까지 거슬러올라간다는 주장과 호환되지 않을 수 있는데다가, '''코자키야 말로 '진짜 우크라이나인''''이라거나 '''코자키는 우크라이나인과 별개의 '민족''''이라는 카자크 민족주의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양되는 중이다. 이 코자키 집단의 형성 과정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들어갔고, 형성 시기도 특정한 시기로 구체화시키기 어렵다. 더욱이 초기의 코자키 집단에 대한 문헌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카자크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 예속을 피해 도망한 농민들임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코자키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과정을 통해 우크라이나 땅에서 형성되었는지 확실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코자키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키예프 루스]]가 몽골의 침략으로 붕괴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성립하는 15~16세기 무렵이었다. 다만 역사적 증거를 바탕으로 13세기 몽골 제국의 키예프 대공국 침략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여겨진다. 그 근거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역사학자 '바실리 글라즈코프'는 [[동로마]], [[이란]], [[아랍]]의 문헌 기록에 따라 [[10세기]]에도 우크라이나 [[스텝(지리)|스텝]] 지역에 코자키, 또는 코자키의 원형이 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사학자 카람진도 [[1223년]] [[몽골군]]의 [[동유럽]] 침략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언급하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드니프로강 유역과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는 유목문명과 정주문명, 스텝과 농경지대,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이 맞닿아 있는 일종의 경계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코자키 집단이 출현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어떤 세력도 이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이 예속을 피해 도주한 유이민 집단에서 비롯된 코자키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몽골제국이나 이슬람 세력의 진출 이전부터 우크라이나 지역은 이미 '경계지대'로 기능했다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스텝지대에는 슬라브인이 유입되기 이전부터 이미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알란]] 같은 아리아(이란) 계통의 유목민족들이나 [[킵차크]], [[쿠만]], [[페체네그]], [[노가이 칸국|노가이]] 같은 튀르크계 유목민족들이 수시로 거쳐가거나 또는 정착해서 번성하고 있었다. 코자키의 형성 과정에 대한 정론은 몽골의 서방 침공으로 루스계 국가들이 몰락하여 현 우크라이나 일대에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몽골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도 전에 오늘날 우크라이나 땅은 각종 유목민족과 루스계 국가들간의 내전과 이합집산으로 이미 개판 5분 전이었다(...). 그렇기에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 이전에도 광활한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서 예속과 착취를 피하며 반유목적 삶~~과 때로는 약탈~~을 영위하며 이후 등장할 코자키의 원형이 될만한 집단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설명은 꽤 개연성이 높다. 몽골의 침략과 키예프 루스의 몰락, 그리고 뒤이은 몽골 제국의 분열은 우크라이나 일대에 존재하던 코자키 집단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만한 규모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중반에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 뒤를 이어 몽골인들이 세운 [[킵차크 칸국]](금장칸국)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약화되었고, 여러 후신 칸국들로 분열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우크라이나 일대는 일종의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스텝 지대에 맞닿아 있는 드니프로강 유역 일대에서는 주변의 여러 국가와 세력 간의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다. 이전투구 끝에 최종적으로 드니프로강 유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남동부 변경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 지역에 아직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못했고 우크라이나 일대는 사실상 여전히 열려있는 국경지대로 남아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부터 모스크바 공국에 이르기까지 동유럽 일대에서 [[봉건제도]]가 빠르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농노로 전락할 위기에 몰린 루스계 농민들을 비롯하여 봉건제적 신분질서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사회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은 '열려 있는 국경지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변경인 드니프로강 하류 지역, 즉 자포리자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유입된 인구가 현지의 코자키 집단에 합류하면서 코자키의 세력은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코자키는 종전의 단순한 유이민 집단 수준을 넘어서 하나의 확고한 사회로 조직화되어갔다. 이렇게 살던 코자키 집단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스텝 지대에 원래부터 살던 원주민들과 [[모스크바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 등 여러 지역에서 정부와 지주의 억압을 피하고자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스텝으로 들어온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즉 [[드니프로강]] 하류 지역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서 반농반목 생활을 했다. 인근의 [[크림 타타르인]]들의 침략 때문에 재산을 가지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유목도 겸했으나,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가 매우 비옥하여 농사가 쉽고 소출이 높다보니 농업도 병행되었다. 그러나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이 계속해서 심각한 위협을 가하자, 이들 '자유인 집단'은 자체적인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자포리자 코자키에 대한 최초의 역사 기록은 14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492년 크림 칸국의 칸은 키예프 사람들과 체르카시 사람들이 티아기니아 부근의 타타르 선박을 불질렀다는 불만을 제기했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알렉산드라스 대공]]은 우크라이나 코자키들 사이에서 범인을 찾아내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체르카시의 방백인 보흐단 글린스키 공은 오차키우에 있는 튀르크 요새를 파괴했는데 칸은 이 사람들을 '''코자키'''들이라고 불렀다. >---- >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자포리자 코자키가 본격적으로 역사속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5세기]]이다. 이 시기를 보통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시대''', 짧게 '''카자크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16세기 중후반 즈음에 이르면 코자키는 드니프로강 하안 지대를 확고히 장악한 채 명목상으로 폴란드 왕국의 신민이지만 실제론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조직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코자키는 이 당시에 이미 폴란드 정부, 크림 칸국이나 심지어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같은 주변세력들과 교섭 또는 협력을 하거나 무력분쟁에 참여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몽골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발생한 힘의 공백과 이어서 벌어진 여러 국가간의 각축전, 그리고 동유럽 일대에서 급속히 진행된 봉건화라는 두 현상이 맞물리면서 코자키가 급속히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구자정, <16세기 말 17세기 초 자포로지예 코자키 집단을 통해 본 우크라이나 역사의 카자크적 기원과 루스(Rus') 정체성> 중 II. 카자크 현상의 태동과 자포로지예 세치의 형성(슬라브연구 vol33, 2017)][* [[https://en.wikipedia.org/wiki/Mykhailo_Hrushevsky|Mykhailo Hrushevsky]], ''Istoriia Ukrainy-Rusy'', 10 vols. (Livov-Vienna-Kiev, 1898-1936), ''HIstory of Ukraine-Rus''' 10 vols., translated from Ukrainian to English (Toronto-Edmonton: Canadian Institute of Ukrainian Studies Press, 1999-ongoing), Vol 7, pp 101 (Citations are to the English edition)]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