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자크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카자크, 그중에서도 특히 돈 카자크는 한국과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던 유럽계 민족 집단이다. 상술한 대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및 극동 지역 확장에 돈 카자크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선봉에 섰기 때문이었다. 당장 17세기 [[나선정벌]] 당시 조선과 맞붙었던 러시아 병사들이 카자크였고, 19세기 말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이후에는 다양한 사유로 조선과 카자크의 접촉이 늘었다. 경제적으로는 [[함경도]]와 [[연해주]]의 커넥션이 더욱 깊어지면서 조선인들과 러시아인들의 인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단적인 예로, 함경도에서는 카자크들의 전통춤인 '[[고팍]]'이 유행해 어린아이들까지 따라했을 정도였으며, 한편으로 카자크들은 국경에서 곡식이나 군마, 소 등의 생필품들을 사 가고는 했다. 코르사코프 동시베리아 총독이 보았을 때, 유럽에서 식량을 가져오는 것보다 가까운 조선에서 식량을 사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열차도 제대로 개통되지 않은 미개척지에서 유럽산 식량만을 멍하니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매달 250~300마리의 소들이 조선에서 수입되었고, 1895년 한 해에는 밀매된 분량까지 합쳐 40,000마리 가량이 러시아에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극동으로 이주하면서 카자크의 이웃이 되었다. 단적인 예로, 아무르 지역 최초의 고려인 마을인 블라고슬로벤노예는 시넬니코프 총독의 명령으로 이주된 조선인들이 카자크로부터 임차한 31 데사티냐의 땅이 기원이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당연히 함경도 지방군과 러시아 제국군 간의 국지전이 때때로 벌어지면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이 당시 한양에서 돈 카자크들의 악명은 유럽 못지않았다. 다음은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밝힌 증언이다. [[파일:201903230403_13150924068503_1.png|width=400]] ▲ 러일전쟁 중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는 ~~[[나선정벌|250년 전의 복수]]를 단행중인~~ 카자크 기병을 묘사한 삽화[* 프랑스의 르 쁘띠 주르날(Le ptit Journal) 지에 1904년 3월 게재된 삽화로 르 쁘띠 주르날은 [[남대문 전투]]를 묘사한 삽화나 중국이라 써진 팬케이크를 열강들이 나눠먹는 모습의 풍자만화로도 잘 알려져있다.] >[[러시아|아라사]]의 서북부에 '''가살극'''(코사크)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납고도 악독하여 [[유럽|구라파]]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와전되어, '가살극 사람들은 퇴화되지 않은 꼬리가 있으며, 사람 고기를 식량으로 삼는다'고 소문났는데, 그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토를 짓밟으며 남하하였다. [[안주시|안주]]의 어느 백성이 암말을 잡아매고 편자를 박다가 갑자기 돌아다니던 아라사 병사를 만나자 말을 미처 풀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아라사 병사들이 이 암말을 보더니 돌아가며 [[수간|음란한 짓]]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 >'''"이들이 가살극인데 성품이 가장 음탕해서, 부녀자를 만나면 늙었는지 젊었는지도 묻지 않고 문득 범한다.''' >'''숫양처럼 하루에 수십 번이나 교합하므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부녀자의 그림자도 없었다."''' > >그들은 또한 의심이 많아서, 늘 약탈하다가도 네댓 명이 모여있는 것을 보면 침입하지 못하며, 먹을 것을 보면 소나 말처럼 반드시 생채로 씹어먹었다. 그들은 말도 잘 타서 한번 휘파람을 불며 달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10여 리를 달렸다. '''용모가 비록 사납게 생겼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만나도 죽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부드러운 빛을 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이를 가는 자는 오직 [[왜놈]]뿐이었다. >이때 [[왜군]]은 황해에 퍼져 있으면서 자기 나라의 식량과 기계 운반 말고는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배를 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분장하여 [[평안도]] 지방을 드나들며 아라사를 정탐했는데, 아라사가 그것을 알고 엄히 수색하여 머리 깎은 자를 보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래서 [[스님]]들 가운데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일본군]]은 모두 머리를 박박 깎았다. 일본군은 스킨헤드는 아니었지만 스님들도 요즘처럼 면도를 자주 하지 못했으므로 머리 스타일은 비슷했다.]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이 방한모를 썼는데, 아라사 군사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칼 끝으로 모자를 벗겨 머리를 깎았는지 아닌 지를 조사했다. > >-《[[매천야록]]》, [[황현]]- [[러시아 내전]] 당시 시베리아 전역에서도 적군과 백군 간에 혈전이 벌어졌다. 러시아인을 제외한 극동의 양대 축이었던 고려인과 카자크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상당수의 아무르 카자크들은 백군 편에 가담하였고, 고려인들은 반대로 각자의 이유[* 사회주의자도 있었지만, 독립을 위해 소련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민족주의자들도 많았다.]로 백군에 서거나 적군 편에 섰다. 이 때문에 두 민족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단적인 예로, 당시 연해주에서 대한의용군사회 중대장으로 적군 편에서 독립운동 중이었던 [[김홍일(군인)|김홍일]] [[대한민국 국군|국군]] [[중장]][* 후에 [[중국 국민당]]의 [[국민혁명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에서 복무하며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대일 항전을 이어나갔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 초반에 패퇴하던 국군을 수습해 [[시흥전투지구사령부]]란 이름으로 [[제1군단]]을 직접 창설해 북한군을 막아섰다. 이 지연전으로 북한군의 공세는 상당히 둔화되어 훗날 유엔의 반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군의 원로이자 독립운동의 거두로써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도 반대하였으며, 하나회의 [[12.12 군사반란]] 직후인 1980년 서울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은 '''볼로차예프카 전투'''[* '''시베리아 내전의 결정적인 회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백군이 괴멸되면서 적군이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되었다. 적군의 고려인 부대가 선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직후 한인특립보병대 연대장으로 승진하여 아무르 일대의 넓은 지역을 경비하게 되었다. 회고록 《대륙의 분노》에서 밝히 바에 따르면, 이는 백군 지지층이었던 아무르 카자크 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상적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두 민족이었지만, 의외로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처음에는 고려인 부대를 두려워하던 주민들도 일손을 거들어주는 대원들에게 점차 마음을 열었는데, 특히 [[문맹률]]이 높아 실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것을 고려인들이 도와주면서부터였다고 한다. 편지를 쓰고 읽질못하거나, 러시아어 《성경》을 가지고만 있고, 읽지는 못했던 것을 상대적으로 식자층이 많았던 고려인 병사들이 기꺼이 대필해주고 대신 읽어 주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나중에 가서는 많은 병사들이 결혼해서 눌러앉는 정도가 되었다. 당시 김홍일 중장은 선봉에서 백군 및 일본군과 싸우지 못하는 것, 그리고 고려인 독립운동 세력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부하들과 관할 지역 카자크 주민들이 이렇게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에 내심 흐뭇해했던 듯하다.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한인특립보병대를 해체시키자 격분하여 러시아를 떠나면서도, 그는 자기 부하들과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각서를 받아내고서야 출국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순수했던 시베리아 주민들이 그립다며 다시 한번 찾아가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면서도, 소련 정부의 폭정 아래 이들이 얼마나 변했을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불행히도, 연해주에 남은 그의 부하들과 가족들은 20년쯤 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게 되니, 김홍일의 생각은 불행히도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