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 (문단 편집) === 현대 === [[파일:1950년대 카이로1.jpg|width=800]] 1950년대 카이로 [[파일:카르스 엘닐 다리1.jpg|width=800]] 카르스 엘닐 다리 [[파일:카이로 야경1.jpg|width=800]] 현대 카이로 전경 그러던 1952년 검은 토요일 사건[* 카이로 화재라고도 한다.]으로 카이로 시내에 있는 거의 700개의 상점, 영화관, 카지노, 호텔이 파괴되었다. 이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나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카이로를 떠났으나 도시의 인구는 계속 증가했고 결국 당시 대통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는 다리와 고속도로 네트워크를 개선하고 게지라 섬[* 카이로를 지나는 나일 강에 위치한 섬이다. 미국 뉴욕시의 맨해튼 섬의 도시에서의 위치와 비슷하다.]과 강 주변을 개발했다. 20세기 후반 카이로는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났고 [* 1947년 약 300만명이었던 카이로 광역권의 인구는 2006년 1600만명으로 증가했다.]이로인해 카이로 근교에 불법주택문제가 심화되는 등 여러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1992년 10월 12일 규모 5.8[* [[2016년 경주 지진|경주 지진]]과 규모 자체는 같고,최대진도도 VIII(8)로 비슷하지만 안 그래도 후진국인 이집트에서 그것도 1992년에 일어났기에 피해가 극심했다.]의 지진이 발생해 545명이 사망하고 6512명이 부상,기자 피라미드의 벽돌이 떨어져 나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의외로 간과하기 쉬운 사실인데,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는 세계적으로 봐도 상당히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아프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더군다나 카이로는 아라비아판도 근처에 있는 상당한 지진 위험지대다.당장 세계적인 [[초화산]]으로 꼽히는 [[산토리니]]와 [[나폴리#s-5.1|캄피 플리그레이]]가 [[지중해|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한국에는 당시 이집트와 수교 전이였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나름 유럽권 언론에는 크게 보도된 사건이다. [[2011년]] [[아랍의 봄|아랍 민주화의 물결]]이 이집트에도 불어닥쳤고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200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당시 30년째 이집트를 통치하던 독재자 [[2011년 이집트 혁명|[[호스니 무바라크]]를 끌어내리기 위한 시위]]를 벌였고 결국 무바라크는 하야하게 된다. 무바라크의 사임 이후 무슬림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를 거쳐 [[압델 파타 엘 시시]]가 집권한 이후에는 카이로 동쪽에 새로운 행정수도가 건설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와도 인연이 있는 도시인데,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언급한 국제 협약인 [[카이로 선언]]이 발표된 의미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해당 선언이 있었던 장소에 카이로 선언 기념비를 건립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788967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