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스텔라 (문단 편집) == 유래 및 역사 ==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과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것이 [[포르투갈]]로 전파되어 카스테이라(Casteira)[* 과거 일본에서도 카스테이라(カステイラ)라고 불렀다.]라고 불렸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포르투갈 어로 '성(城)'을 뜻하는 단어 카스텔루(castelo)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포르투갈에서 만드는 카스텔라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빵인 빵들로(pão de ló)([[스펀지케이크]]), 혹은 볼루 에스폰조주(bolo esponjoso)는 둥근 도넛 모양으로 생겼는데, 정말 성과 비스무리하다. 카스티야도 성채라는 뜻의 단어 카스티요(Castillo)에서 유래한 국명이며, 성 모양을 국장으로 삼았기에, 결국 두 가지 설 모두 성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한 셈이다. 아래의 그림이 빵들로. [[파일:external/blog.jtb-grandtours.jp/1252140771.jpg|width=100%]] [[파일:external/26021fa5fd31ea9f3583eb85aa4fc2a80841d61a2dcf83872b505d3c403c05ab.jpg|width=100%]] [[파일:external/t2.rg.ltmcdn.com/img_pao_de_lo_193_600.jpg|width=100%]] 본래는 간식용으로 만들던 빵이었으나, 대항해 시대에는 장기 보관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파운드케이크]]와 함께 뱃사람들의 주식으로도 쓰였다. 그 당시의 카스텔라는 지금보다 계란을 적게 쓰고, 설탕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써서 절이다시피 할 정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족히 한 달은 보관할 수 있었다 한다.[* 전근대 시절의 [[염장고기]]나 [[젓갈]]에 들어가는 소금의 양이 현재보다 훨씬 많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오븐]]에 굽는 것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오븐 없이도 만들 수 있어서 배 안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점도 뱃사람들이 즐겨 찾은 이유가 되었으며, 또 오븐이 없는 [[일본]]에 전파되기 좋은 점이기도 했다. [[동양]]에는 [[일본]]에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나가사키]]의 [[히라도]]와 [[데지마]]에 위치한 상관에 정착하고, 현지 주민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처음 전파되었다. 포르투갈인들에게 카스텔라 제법을 전수받은 일본인들에 의해 카스텔라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카스텔라와는 다른 일본 현지의 로컬라이징을 거쳐 나가사키의 명물이 되었다. 나가사키식 카스텔라 재료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엿]]이라고 한다. 일본식 카스텔라가 부드러운 까닭은 포르투갈에는 없는 물엿을 첨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포르투갈식도 최근들어 위 두 번째 사진처럼 [[시럽]]을 이용해 부드럽고 더 달달한 맛을 내는 형태도 생겨났다. 초기에는 [[쇼군]]이나 [[다이묘]] 정도의 높은 계급의 사람들만 먹던 고급 과자였고, 주로 [[차]]와 함께 먹었다고 한다. 외국 사신들을 대접하는 음식으로도 쓰였는데, [[1682년]] [[조선 통신사]]가 [[에도]]를 방문했을 때, 카스텔라와 [[별사탕]], [[양갱]]을 대접받았다는 기사가 있는데[* [[조선]]측에서는 '설고(雪餻, 雪糕)'라고 불렀다고 한다. '눈[雪\] 같은 떡'이란 의미. [[백설기]]의 일종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가장 인기가 좋았다고. 나중에 재정 문제로 카스텔라를 대접하지 않게 되자 왜 대접하지 않느냐고 삐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측 모두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데, 조선 통신사 측에서는 험한 바닷길을 건너서 겨우겨우 고생하며 왔다. 실제로 지금의 통념과는 달리 당시의 통신사는 너무 위험한 여행길 탓에 인기가 없는 자리여서 통신사로 임명되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 보낼 정도였으며, [[부산]]에 도착해서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출발할 정도였다. 험하고 먼 길을 온 임장에서 대접의 질이 낮아지면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막부 측에서는 통신사 행렬을 조공 사절로서 홍보하여 권위를 세우려고 초빙한 것이라서 '조공을 받는 대국은 사신 접대도 대국의 수준에 걸맞게 융숭하게 함이 마땅하다'는 논리로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서 접대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통신사 한 번 접대하는 데 막부 전체의 1년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거액이 들어갔다는 설도 있다. 또한 이 접대에 재정을 너무 쏟아서 봉기가 일어난 적도 있다.)] 중국에서도 마카오를 통해 포르투갈인 선교사와 상인들이 드나들었던 관계로 포르투갈식 카스텔라를 대접용 음식으로 제공했다. 자체적인 빵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널리 퍼진 것은 아니었지만 후식으로 먹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계란떡으로 불렀고,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음차해 "가수텨라([[加]][[須]][[底]][[羅]])[* 당시 '저-底'는 텨로 구개음화를 통해 저로 바뀌었다.]"라고 불렀다, 숙종은 말년에 사신들이 가져온 레시피 그대로 포르투갈식 카스텔라를 맛봤는데 원조 레시피를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만족하고 먹었다고 하며, [[정조(조선)|정조]] 집권기에 활동했던 실학자인 [[이덕무]]도 가수텨라 조리법을 [[https://theqoo.net/square/1114688355|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이 당시에 밀가루와 설탕이 비쌌기 때문에 카스테라는 아무나 먹지 못하는 왕이나 부유층만의 별식으로나 취급되었다. 이 당시에는 약과와 유과 같은 한과도 꽤 비싼 음식이라서 아무나 먹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