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나우지 (문단 편집) === 카나우지 삼각 구도 === [[파일:Indian_Kanauj_triangle_map_svg.png]] --재미있는 삼국지-- 카나우지는 인도의 3국 정립기인 8세기 말 ~ 9세기 동안 3국의 접경지로서 3국간의 쟁탈전이 이어졌다. 한국 삼국시대의 남한강 유역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784년, 카나우지의 왕인 바즈라유다가 사망하자 프라티하라 군대가 진군하여 새로 즉위한 이드라유다의 군대를 격파하고 카나우지를 속국화하였다. 그러자 동쪽 팔라 왕조의 군주 다르마팔라가 반발, 785년에 양측이 부딪혔으나 팔라 군대가 패하여 회군하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쪽의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구자라트의 정예군이 벵골에서 회군하고 있을 때에 북진, 말와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칸나우지를 함락하며 순식간에 북인도의 핵심부를 장악하였다. (786년) 같은해, 팔라 왕조는 재차 서진하였으나 이번에는 라슈트라쿠타 군대에게 패하였고 처음으로 데칸 고원의 세력이 인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듯 하였다. 하지만 793년, 라슈트라쿠타의 명군 다라바르사가 사망하였고 내전이 발발하였다. 이에 다르마팔라는 3번째로 서진하여 이번에는 별 어려움 없이 카나우지를 접수하였고 카크라유다를 허수아비로 옹립하였다. 당시 프라티하라 왕조 역시 제위 계승 분쟁으로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내전은 곧 나가부타 2세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는 795년에 동진하여 팔라 군대를 격파, 9년만에 칸나우지를 손에 넣었다. 그러자 --근성가이-- 다르마팔라는 4번째로 서진하여 프라티하라 군대와 겨루었으나 패하였다. 이듬해인 796년, 남쪽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고빈다 3세는 내전을 끝내었고, 칸나우지 회복을 결심하였다. 1차 정복 때와 유사하게, 프라티하라 측이 팔라와의 전쟁으로 지쳐있는 틈을 타서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북진하였고 3년만에 카나우지를 점령하였다.[* 다르마팔라 역시 고빈드 3세에 형식적으로나마 굴복하였다] 라슈트라쿠타 조는 6년간 카나우지를 다스리다가 남인도의 반란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카나우지를 버리고 후퇴하였다. (802년) 그러자 --아직까지 살아있던-- 다르마팔라는 5번째로 서진, 칸나우지를 회복하는 기쁨을 누렸다. 10년간 카나우지를 수중에 넣었던 다르마팔라는 812년에 죽었고, 그틈을 노린 프라티하라 왕조의 나가부타 2세는 동진하여 카나우지를 16년만에 회복하였다. 이후로는 나가부타 2세가 사망한 833년에 잠깐 팔라 왕조가 카나우지를 함락한 일을 제외하고는 11세기 초반까지 구자라-프라티하라 왕조는 카나우지를 영위할 수 있었고, 10세기 후반부터는 그 수도가 되었다. 2세기 (812년 ~ 1018년)에 걸친 프라티하라 지배기에 카나우지는 북인도 최대의 도시로서 번영하였다. 프라티하라 (784 ~ 786년) 라슈트라쿠타 (786 ~ 793년) 팔라 (793 ~ 795년) 프라티하라 (795 ~ 796년) 라슈트라쿠타 (796 ~802년) 팔라 (802 ~ 812년) 프라티하라 (812 ~ 833년) 팔라 (833년) 프라티하라 (833 ~ 1012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