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칭다오시 (문단 편집) == 역사 == 도시의 이름은 19세기 말 이전의 현재의 칭다오 스난구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내주부 교주 즉묵현의 평범한 [[어촌]] 청도진으로, 마을이 면해있는 만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청도(지금의 샤오칭다오)로부터 이름을 따 왔다. 지금은 칭다오시가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자오저우만 일대는 [[http://map.baidu.com/?newmap=1&s=s%26wd%3D%E9%9D%92%E5%B2%9B%E5%B8%82%26c%3D236&from=alamap&tpl=mapcity|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항구 만들기 딱 좋은 위치로, [[춘추전국시대]]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항구도시가 번성하였으나, 대체로 만 안쪽인 교주(지금의 자오저우 시), 즉묵(지금의 지모구청) 등이 번성했고 만 밖에 있는 청도진은 그다지 번성하지 못하였다. [[전한]]시대부터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칭다오 시가지(자오저우만 동안) 일대는 불기현(不其縣)으로 불렸으며, 고대부터 영산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 라오산을 끼고 있어 그럭저럭 이름은 있었으나 주변 대도시인 낭야(현재의 황다오구 랑야진 일대)나 즉묵(即墨, 지모)에 비해서는 지명도가 밀렸다. 수나라 때부터는 원래 핑두시 쪽에 있었던 즉묵현과 불기현이 합쳐지고 그 치소가 지금의 지모구청에 설치되면서 칭다오만 일대도 즉묵에 속하게 되었다. [[부산]]과 [[동래]]의 경우와 비슷하게 현재는 칭다오가 넘사벽으로 커졌고 즉묵은 칭다오의 현급 도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세기]] 말 청도진이 위치해 있던 [[자오저우 만]](胶州湾, 교주만) 어귀가 [[독일 제국]]에게 할양되어 [[해군]] 기지인 [[키아우초우]]가 되었다.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100년 정도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서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칭다오는 [[키아우초우]]의 중심지였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신경쓰지 못하는 틈에 [[일본 제국]]이 이곳을 점령했다. [[1927년]] [[1차 산동파병]]과 [[1928년]] [[제남 사건|2차 산동파병]] 등 일본의 중국 출병 기지로 활용되었다. 그 후로 [[국민정부|국민당 정부]] 아래서 12개 직할시 중 하나로 지정되어서 지역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국민당 정부 시절에 지정된 직할시였지만 [[산둥성]] 내에서 [[성도]]인 [[지난시]]를 능가하는 경제력과 인구를 가지고 전국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기에 은근히 [[직할시]]로 독립하길 원하는 시민들이 있다. 이후 [[중일전쟁]]에 다시 일본에게 점령되었다가 중화민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국공내전]] 땐 화북지역 [[국민당]] 최후의 보루로 버티다가 [[1949년]] [[6월 2일]] 공산당에 점령된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 시기 연안개방도시[* 개혁개방 정책의 선행배포 버전으로 총 15개의 항구도시가 우선적으로 개방 되었다.]로 선택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