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침구학 (문단 편집) === 역사 === 일부에서는 '한 성인에 의한 체제구축' 이론을 고수하지만, 현재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역시 침구학도 인간이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침이라는, 여타 의학 체계에는 유례가 없는 도구를 이용한 것은 한의학만의 독자적 특성이지만, 침구학에 사혈요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혈위의 상당수가 정상 및 병적 박동부위 근처에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최초의 경혈의 형태는 사혈부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춘추전국시대]]에 조성되어 근대에 발굴된 마왕퇴 한묘에서의 부장품에는 족비십일맥구경, 음양십일맥구경이라는 경혈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경혈학의 일인구축설은 현재는 거의 폐기된 상태다. 당시의 경락체계는 현재와는 달리 11개의 경혈이 사지에서 몸통으로 뻗어가는 향심성 체계였다. 이때는 바늘을 사용하지 않고, 뾰족하게 다듬은 [[돌]]이나 [[뿔]]을 이용해 [[지압]]하는 형태에 가까웠다. 이때 사용한 돌을 잠석(箴石)이라 했다. 이때부터 중국 고분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침이 간혹 출토되기도 하나, 의료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황제내경]] 및 [[상한론]]이 조성된 전한 시기에 이르면 이미 경혈의 이름이 완성되고 12경락의 순환성 체계가 조성되었으며, 이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경락 체계 자체의 변이는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 무렵 [[철기]]의 활발한 보급과 함께 철로 만든 침도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의 침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거의 [[단도]] 수준으로 굵은 것들이 꽤 있었는데[* [[동의보감]]에서도 이런 류의 침들을 일부 소개하고 있다.], [[사혈]]이나 외과용 [[메스]]를 겸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금속 가공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침의 두께가 점점 가늘어져 오늘날에 이른다. 침구학은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의학적 경험을 토대로 경혈의 효능을 정리하고 수기법에 대해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이론이 좀 더 정교해지고 체계화되었으며 응용 방법이 발전하는 등 확실한 성과는 있었다.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과학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침구학의 과학적 효능에 대해 검증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새로운 경혈을 찾고 기존의 경혈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단, 현대에 한중일이 협의(...)한 바에 따르면 표준 경혈 수는 361개이다. 전통적인 365개(날짜 수에서 비롯한)에서 조금 조정이 된 것. 언제부터 침술이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힘들지만,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침술의 흔적이 약 3천년 전 한반도 북부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1/2018011100165.html|설이 있다.]]([[경희대학교]] 사학과 강인욱 교수) 이후 [[신라]]에서 당나라에 침 400매와 특산품인 [[우황]]을 보낸 기록이 있으며, [[효소왕]] 원년(692) 의학(醫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침경이라는 교재로 학생을 가르쳤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