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문단 편집) == 친일파 숙청? == '''흔히들 '남한과 달리 북한에선 모든 친일파를 숙청했다'고 세간에 널리 알려져왔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친일파들이 존재했다.''' 우선 실제로 남한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이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은데 비해 북한에서는 그나마 처벌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에서 있었던 친일파 숙청의 희생자들을 보면 친일파도 처벌되었지만 김일성 우상화에 방해가 되는 다른 독립투사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경우도 있다. 더구나 김일성을 지지한다고 전향한 친일파는 오히려 정부 요직에 앉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북한에서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에 가담한 자들은 보통사람보다 재산이 많았고 지주 및 유망한 기업가인 경우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숙청이 됐으며, 대부분은 당하기 전에 월남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그나마 제대로 청산됐다고 볼 수 있는 친일파는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에서 혐오하는 지주들과 기업가들이었으며, 이들을 제외한 북한의 친일파는 후술할 내용처럼 완벽하게 숙청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한도 친일 논쟁에서 깨끗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8.15 해방 이후, 38선 이북의 지역의 모든 행정권은 소련 군정에 의해 권력을 이양받은 지역 [[인민위원회(북한)|인민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 인민위원회의의 구성원은 지역마다 달랐지만 주로 좌파/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막상 모여서 일을 해보려고 하자 '''실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인민위원회 자체가 '공산주의/좌파 세력들만 주도했었다'고 보기에는 매우 무리가 있다. 초창기 남한의 미국이나 북한의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던 초창기에는 중앙인민위원회에 공산주의자들이 다수를 점령했을지언정 지방 인민위원회 경우는 지역에서 꽤 세력있던 유지나 민족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들까지 치안/행정 업무에 힘을 기울였었다. 특히, 남한 지역에서의 인민위원회 경우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지지가 매우 많았다. 그런데, 나중에 남한에 미군이 진주했을 때 미군이 이들 인민위원회를 아예 부정해버려 결국 남한에서의 인민위원회는 소멸... 이건 명백한 [[흑역사]]였다. 북한의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는 이들 인민위원회를 살렸지만, 문제는 이 인민위원회를 변질시켜 지역에서 민족주의 성향이 있던 사람들을 다 내쳐버리고 아무런 실무 경험도 없는 공산주의자들만 기용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라는 것을 명심하자. 이는 오랫동안 [[일본 제국]]이 한국인들을 저교육 상태로 방치한 데다가, 행정실무나 업무기구 구성을 맡아 실무 경험을 갖추고 있는 자들이 [[일본인]]이거나 친일파밖에 없었다는 점이 크다.[* 실제로 북한의 초대 내각 구성원인 정준택은 일제하에서 광산 지배인을 한 경력이 있다. 북한에서도 '나름' 자기들이 악질 친일파들을 처단한 사례를 [[박석윤]](매일신보 부사장) 등을 거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가' 출신으로 친일 경력 있는 [[이종만]](이 사람은 '최고인민의회' 의원직까지도 역임하고, 애국렬사릉에 묻힐 정도로 북한에서는 꽤나 거물인사다.), 역시 문학 계열에서 대표적인 친일 경력 있는 지식인 이찬(이 사람은 해방 후 '김일성 장군님의 노래'라는 시를 지어 북한에서 '''혁명 시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1573902?sid=103|지금도 북한에서 굉장히 대우를 잘 받고 있다!]]) 등을 그대로 기용한 것을 보면, 북한 역시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 그래서 북한은 소위 탄백 작업이라는 형식의 [[자아비판]] 및 공개사과의 형식[* 이것도 심하지 않은 친일을 했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밑에서 설명할 악질적인 친일파들의 상당수는 그런 거 없었다.]으로 악질적인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친일파들을 용서해주고, 이들을 행정기구에 앉히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담으로 당시의 상황을 북한의 주장대로 잘 그린 영화가 바로 〈그들의 청춘시절〉이라는 영화다. 주인공이 [[일제강점기]] 때 굉장히 잘 나가던 선박 기술자인데, 해방이 되고 나자 주변에서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남조선에서 온 월남 제의를 뿌리치고'''(이 부분이 꽤 중요. 남한의 모 선생에게서 온 편지를 받는데, 편지에는 기술자를 우대한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북한에 남아있다가 민족반역죄를 조사하는 기관에 붙들려 갔다가, 인망 있는 당 간부가 와서 "이렇게 중요한 사람을 잡아 가둬서 어쩌자는 거냐"라며 관계자를 면박을 주고 구출해 준 뒤에, 갑자기 [[김일성]]이 나타나서 모든 화합을 이끌어내고 화기애애하게 마무리 짓는다.] 어쨌든 그나마 변명하자면, 남한은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군 내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살기 위해서 열심히 싸운 것도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스스로 평가하길 '''"일본군 부역자 따위 없는 정통성 있는 인민의 군대"'''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숙련도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심지어 [[팔로군]]에서 [[분대장]]을 하던 사람이 군단장직을 맡지 않나, 상당히 [[개판]]이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한국전쟁 개전 후 춘천에서 군대의 진입이 막힌 것, 서울에서 3일 이상 지체하게 된 것 모두 이러한 문제들, 다시 말해 '''자격 없는 지휘관'''들의 삽질 때문이라고 한다. [[박헌영]] 평전에 따르면 '''당시 대규모 전투를 입체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개전 당시 2개 군단으로 편성 되어있는데 당장 [[김일성|총사령관]]부터가 장관급 장교 경험은 고사하고 '''영관급은 커녕 빨치산이랑 소련군 대위 경력이 전부다.'''] 반민특위 등 친일파 자체를 청산하려는 노력도 했다. 물론, 아무리 한국전쟁에서 열심히 싸웠다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북한 역시 김일성 정권에 충성하면 일제시대 장교출신들을 기용한 것은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6.25전쟁에도 참여를 했다.] 반민특위도 실제 제대로 처벌한 사례가 전무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과거에 대해 비판과 옹호로 왈가왈부가 많다. 그러나 북한은 오히려 박헌영이나 김원봉의 경우처럼 김일성보다 독립투쟁을 열심히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김일성 우상화 작업의 걸림돌로 판단하여 친일미제간첩으로 몰아붙였고, 이것이 오늘날 북한 정권에서 인정하는 공식 역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북한 초기의 하부 행정기관에서의 친일/부일경력자 기용은 가려졌으며 왈가왈부는커녕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김일성과 김일성을 따른 만주파를 마치 그들만이 홀로 일어난 구국의 독립영웅인 양 포장하고, 나머지 항일운동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권에서 친일파를 기용할 리가 없다는 북한 정권의 역사관에서도 기인한다. 물론, 박헌영은 [[한국전쟁]]의 주동자이자 원흉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독립운동가라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행정조직으로 편입되지 못한 데다, 오히려 그러다가 공개 사과를 하고 자아비판을 했다간 자신의 재산이 몽땅 날아갈 처지에 있었던 [[지주]]나 [[기업가]]들은 결국 대부분 북한을 떠나서 [[월남]]하게 된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가 공화국을 건설할 때 즈음에 평양의 기업가들이 찾아와서 조국 건설에 도울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난 걔들도 다 포용했음"'''이라고 거짓말이나 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스스로 공산주의 역사변화 원칙에서 봉건제 → 자본주의 →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 사회주의 노동자/농민 혁명 → 공산주의 완성에 따라 정상궤도를 탄 국가라고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악성선전이고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런 식으로 북한 정권의 요직에 올라간 사람이 바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북한)|김영주]]였다. 그는 일본 제국 육군 [[관동군]]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이를 옹호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했다"''' 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다만 김영주가 관동군 통역으로 일할 당시, 그의 나이가 17세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다. [[7.4 남북 공동 성명]] 때는 [[이후락]]과 함께 서명하고 동시 발표를 했을 정도로, 남한에서는 북한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후반 김정일과의 후계구도 경쟁에서 밀려난 후 한동안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1993년 국가 부주석에 올랐으며 그후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을 맡았었다. 하지만 김영주가 관동군 통역이라고 친일파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냥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해방 후 미군통역으로 일했다고 무작정 친미파로 보는 건 무리가 있고 맞는 말이다. 해방 후나 6.25전쟁 때 미군통역을 했다고 해서 친미파나 미국의 앞잡이로 보는 것이 무리가 있다. 진보 쪽에서 진정한 언론인으로 군사독재와 전체주의에 저항한 지식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리영희]]만 봐도 6.25때 미군 통역장교를 하며 국군에서 7년간 복무했고 이승만과 사이가 각별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통역을 맡기도 했었다. 더구나 김영주가 통역으로 일한 그 당시는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등으로 일본의 공적1호로 될 시기인데 그 동생이 통역으로 있었다는 것도 어폐가 있고 사실은 김일성 체포 내지 회유를 위한 인질성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노골적인 친일파들로 손꼽히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인 '''[[심영(배우)|심영]]''', [[문예봉]], [[황철]], [[리면상]], 조령출 등의 인물들이 해방 후에는 월북했고 또 다른 권위주의 체제였던 북한 정권을 선전하는 역할에 충실하며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북한도 그냥 필요에 따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봐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김정일]]의 부인인 [[고용희]]도 골수 친일파 후손이다. 자세한 것은 고용희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