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평요람 (문단 편집) == 편찬 과정 == 1441년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세종은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직접 지중추원사 [[정인지]]에게 "무릇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보아야 하고, 그 자취를 보려면 오직 사적(史籍)을 상고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한 후, 후대 정치인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사적 중에서 정치의 귀감이 될 사실들을 간추려 책을 편찬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세종 27년에 치평요람 150권이 모두 완성되었다. 대제학 정인지의 서문에는 세종의 교시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무릇 정치를 하려 하면 반드시 전대의 치란의 자취를 살펴봐야 하고, 그 자취를 보려 하면 오직 사책을 상고할 수밖에 없는데, 주대 이래 대대로 사책이 있어 분량이 호대(浩大)하므로 두루 상고할 수가 없다. 내가 송유(宋儒)가 만든 《자경편(自警編)》을 보니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절(節)로 나누고 유(類)대로 엮어 간략하면서도 요긴하다. 옛 사람이 만든 책을 그와 같이 즐겁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일반 사람도 책을 널리 보기 어려운데 하물며 인주가 만기의 여가에 어찌 박람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사책을 상고하여 선악의 권징할만 한 것을 뽑아 책으로 만들어, 내가 보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후세 자손들에게 영원한 가르침이 되게 하라. 우리 동방에 나라가 선 지 유구하니, 그 흥망성쇠를 몰라서 된단 말인가. 아울러 편입하여 너무 복잡하지도 너무 간략하지도 않게 하라. >---- >치평요람 서문 하지만 편찬이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이유에선지 이후 간행이 되지 못한채 프로젝트가 묶여버렸고 세종실록 27년 3월 계묘일 이후 기록에서도 책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하릴없이 붕 떠 있던 것을 다시 찾은게 [[세조(조선)|세조]] 때였다. 세조 5년 9월 경진일(1일)에 [[이극감]]이 '세종 대에 편찬됐던 이러이러한 책이 있는데 전하의 아버님인 세종께서 [[가뭄]] 중에도 편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편찬되는 과정에서 3품 이하의 문신들에게 세 차례나 자급(資級)을 더해줄 정도로 각별히 신경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뒤를 이은 분들이 아직까지 간행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라고 주장하며 인쇄하자고 발의하면서 다시 책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극감의 얘기를 듣고 세조가 치평요람을 살펴본 후 대신들에게 교정 여부를 물어보게 되는데, 이극감은 책이 거칠게 만들어져 있고 [[송나라]] 이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면서 내용을 수정, 증보하고 연대를 높여 [[명나라]]까지도 포함하자고 주장하면서 세조 대에 다시 교정 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후 세조 6년 2월 계축일(2일)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잠시 교정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꾸준히 작업이 이루어져 중종 11년에 이르러 모두 간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