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과 (문단 편집) == 역사 == 치과의사가 일반 보통의 의사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치의학이 의학이면서도 의학과는 별도의 교육과정을 가지게 된 것은, 치의학과 의학이 학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19세기경까지만 해도 치의학은 의학에 비하여 발전이 상대적으로 느렸다. 의과대학이 설립되고, 일반적인 의학이 내과를 기반으로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갖추어 나갈 때, 치과치료는 아직 전문인에게 진료받거나 하는 게 아니었고, 치과의사라는 직업도 이발사가 겸직하는 등 숙련된 직업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치의학은 의학 계열에 들기는 하지만 의학과는 확연히 구별됐다. 치과진료를 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2600년경 [[고대 이집트]]의 헤시-레(Hesi-re)이다. 그는 [[의사]]였는데 의사로서의 평범한 진료와 더불어 '이를 뽑는 것'(발치)과 '농이 생긴 턱뼈에 구멍을 뚫어 고름을 빼내는 일'(배농)에 능숙했다고 전해진다. 18세기까지는 치아의 질병인 치아우식병이 발생되었을 때 그냥 방치하거나(...) 간단한 전통적 치료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전통적 치료방법은 대개 [[이발사]]와 [[대장장이]]가 수행하였다. 이발사는 이발, [[외과]] 진료, 치과 진료를 동시에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치아가 우식되는 현상과 치아가 우식되는 원인 및 치료 방법을 1728년에 프랑스의 외과의사였던 포샤르(Pierre Fauchard)가 Le Chirurgien Dentiste라는 서적에 기술하였다. 이 책은 최초의 전문적인 치과 의학 서적이다. 1740년대에 들어서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외과의사와 이발사의 겸업이 금지되었다. 18세기 중반을 거쳐서야 치과의사라는 전문인이 생겨났고, 19세기 초반에 들어서 치의학을 체계화하기 위한 운동이 생겨났다. 그러나 19세기 중엽까지도 치아에서 발생되는 질병에 대한 치료는 부랑발치공(Barber surgeon)[*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병에 걸린 치아를 발거하는 사람]의 치아발거행위에 불과했고 이 부랑발치공들이 자리잡아서 약재와 가발을 만들어 판매, 이발 및 작은 수술 등과 함께 치아 발거를 수행하였다. 학회 등을 결성한 치과의사들은 의과대학과 의사들에게 의과대학에 치의학과를 개설하거나, 의대 교육 안에 포함시켜주길 요청했지만 당시 의과대학의 반응은, 막말로 '어디 천한 것들이 감히!'였다. 거절당한 치과의사들은 결국 의과대학과는 별개로 치과대학을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치과의사가 일반 의사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이유, 치의학 교육과정이 의학 교육과정과 별도로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어떻게 보면 의학-치의학의 관계는 근대의 내과-외과의 관계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 외과는 통합을 이루었지만 치과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 1840년에 미국의 Baltimore College of Dental Surgery(현 [[메릴랜드 대학교|University of Maryland]] School of Dentistry)가 설치되어서 치학(치의학)이 독립적인 실용과학으로 발전하고 실용될 수 있는 기반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이때 설립자는 Dr. Horace H. Hayden(D.D.S)과 Dr. Chapin A. Harris(M.D. D.D.S.)이다. Dr. Hoace H. Hayden의 경우 미국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치과주치의이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 1855년에 미국의 Hunter와 Townsend가 주석, 은, 수은으로 조성된 아말감을 소개하였고, 19세기 말에 개량되어진 아말감이 우식된 치아에 충전하는 재료로 실용되었다. 1883년에는 구강진료용 전동기가 개발되어 회전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발전하면서 우식병소아말감충전법이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 1913년에는 폰스(Dr. Alfred Civilion Fones)가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구강위생사 양성교육을 시작하였고, 1915년에는 영국의 헌터(John Hunter)가 치아에서 발생되는 질병에 대한 진료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1919년에는 뉴질랜드에서 미국으로부터 구강위생사를 양성하는 제도를 도입하였고, 치아간호원을 양성하므로써 1920년대부터 비로소 구강보건진료제도가 발전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876년에 근대 치과 진료가 시작됐고 1885년에는 [[제중원]]의 선교사 및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의 발치를 최초의 근대 치과치료로 본다. 1907년부터 한국인 입치사가 등장하고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생겨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전문적인 치과진료가 시작됐다. 경성치전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승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