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충칭시 (문단 편집) == 역사 == [[춘추전국시대]]에는 [[파]](巴) 지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익주(益州)에 속하다가 [[삼국시대]]에는 [[유비]]가 세운 [[촉한]]의 강주였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 [[백제성]]이 있는 곳도 충칭시이다. [[몽골-남송 전쟁]] 중 하나인 [[조어성 전투]]도 충칭시 허촨구에서 벌어졌다. [[1259년]] 조어성 전투 이후 [[장각(남송)|장각]]의 지휘 하에 원군의 공격에 계속 버티다가 1279년 수장 왕립이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장각은 1280년 원으로 압송되던 와중 측간에서 자결함] 원나라 말기인 [[1362년]]에는 명옥진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 하(夏)나라를 세우고 잠시 이 지역을 지배하기도 한다. 1927년에는 [[쓰촨성]]에서 분리되어 원할시로 승격되었다. 이 때의 충칭원할시의 영역은 오늘날과 달리 현재의 충칭 중심부에 해당하는 영역만을 포함하였다. [[중일전쟁]] 때인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국민정부|중국 국민정부]]의 [[임시수도]]가 되기도 했는데, 이때 [[충칭 대공습]]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도 1940년 8월부터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쓰촨성]]에 재편입되어 충칭시는 1997년까지 [[쓰촨성]]에 속한 시였다. 당시까지 [[쓰촨성]]은 면적과 인구가 중국에서 1위였는데, 1980년대 중국정부는 이런 [[쓰촨성]]을 분할하고자[* 쓰촨성을 여러 개로 분할하자는 의견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부터 있어서 1950년 중국 공산당은 쓰촨성을 촨베이(川北), 촨난(川南), 촨둥(川东), 촨시(川西) 4개 행정구로 쪼갰으나 얼마 안 가 다시 원래대로 환원했다.] [[쓰촨성]] 일부와 [[후베이성]] 일부를 분리해 싼샤성(三峽省)이라는 새로운 성을 신설하려 하였다. 면적은 80,000㎢, 인구는 1,760만 명 규모였으며, 성도는 [[이창]](宜昌)에 둘 계획이였다. 싼샤성이란 명칭은 [[싼샤 댐]]으로 유명한 장강 삼협의 이름을 따온 것이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 그러나 1997년에 직할시로 분리시킨 충칭의 면적과 인구 규모를 보면 결국 싼샤성 계획이 실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싼샤성 신설을 대신하여, 중국 정부는 서부 대개발을 위해 옛 파촉지방에서 옛 촉(蜀), 촉수(蜀水) 문화 지대를 현 쓰촨성으로 분리하고, 옛 파(巴), 파산(巴山) 문화 지대는 충칭직할시로 분리하고자 했다. 이에 쓰촨성의 충칭, 완셴, 첸장, 푸링 등을 통합해 [[1997년]] [[3월 15일]] 충칭직할시가 출범하였다. 다시 말해 '''충칭은 [[성(행정구역)|성(省)]]이 될 수도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중국 최대의 대표 성급시라는 면적과 위상 및 이러한 이면적 사정으로 종종 충칭을 성으로 승격시키자는 제안도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직할시]]와 [[광둥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수장 레벨은 일반 성 서기의 직급보다 높다. 다른 성 서기의 직급은 성부급 정직이나, 직할시, 광둥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장은 국가급 부직이다. 따라서 성으로 승격될 경우, 오히려 직급이 낮아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