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세형 (문단 편집) == 생애 == 985년 출생으로, 그는 어려서 절개를 숭상하였는데, 형제 중에 그 재산을 나누려는 자가 있었음에도 그는 전부 사양했다. 처음에는 숙부 덕택에 감주부가 되어 그 뒤 여러 차례 태자중사로 승진했다. 그 뒤 경양 현령을 지냈는데, 왕지겸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취한 사실이 드러나 법령에 따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도망갔다. 사면 뒤 왕지겸은 관청에 자진 출두했고, 그 뒤 사면되었다. 나중에 봉주를 통판했고, 왕몽정이 그에게 사익을 구했으나, 충세형이 따르지 않자, 왕몽정은 화가 나서 왕지겸으로 하여금 억울함을 호소하도록 유인하였고 그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여주로 이주하였다. 동생 충세재는 형 대신 벼슬을 보내 속죄하고 맹주 사마에 임명되었다. 한참 후 용도각 직학사 이굉이 그를 변호하고, 그 뒤 위위사승에 임명된 뒤 수주감주·동주조서·반주판관사를 역임하였다. 충세형이 살았던 때는 [[서하]]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당시 서부 국경에 군사를 투입시켜 수비가 부족해지자 연주의 동북 200리 안에 있는 고관주를 폐성으로 삼아 서하의 예봉을 막아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은 그의 건의에 동의하여 그에게 이 공사를 맡겼다. [[서하]]군이 여러 번 출격하여 싸웠고, 그는 싸우면서 성을 쌓았는데, 샘물이 없어 모든 사람이 방어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땅을 깊이 파 돌이 이에 맞았더니 석공은 돌이 뚫리지 못한다고 여겼고 충세형이 자갈을 삼태기로 쳐서 백 전을 받고 마침내 샘물을 얻었으며, 성을 축조하여 청간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내전숭반(內殿崇事), 지청간성사에 올랐고, 충세형이 성을 지키는 동안 청간성은 부유하였다. 그는 성을 지키는 동안 강족 추장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서하]]군이 침공할 때 강족들이 이를 알려주어 서하군을 막아낼 수 있었고, 서하군은 환주를 넘볼 수 없었다. 이후 동염원사(東院院使), 환경로(環慶路) 병마검할(兵馬辖辖)에 올랐다. [[범중엄]][* [[악양루기]]로 유명하다.]은 장해로 하여금 세요성을 쌓게 했는데, 이때는 충세형이 병석에 누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충세형은 병석에서 일어나 소부갑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성을 쌓고 그것이 완공된 해인 1045년 세상을 떠났다. 강족 추장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청간성과 환주 사람들은 사당을 세워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 이후 그 아들 [[충악]]이 그의 연줄로, 청간성을 지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