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렬왕 (문단 편집) === 원 간섭기 === 충렬왕 치세는 [[원 간섭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로 이때 고려로 원나라의 문물과 풍습이 많이 들어왔다. 충렬왕 또한 원나라에 자주 들락거리며[* [[쿠빌라이 칸]] 사후 그 후계자인 [[성종(원)|원 성종]] 테무르 칸의 즉위식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원 성종이 상석에 앉고, 충렬왕은 [[제후]]국의 군주로써 위에서 7번째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몽골어를 잘했고, 원나라의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국이 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많이 받았고, 원나라에 빌붙은 부원배, 즉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서, 농민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왕은 의복을 몽골식(호복)으로 바꾸게 했는데 충렬왕 4년 7월에 [[강수형(원나라)|강수형]](康守衡)에게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복색은 요즘 어떠냐??" 고 묻자 >“달단의[* [[타타르]]. 여기서는 몽골을 의미한다.] 의복과 모자를 입었고 조서를 맞이하든지 절일을 하례할 때는 고려 의복을 입고 일을 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이 >“내가 고려 풍속은 그대로 놔두겠다고 했고,[*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화친 조건 가운데, 고려의 풍속과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조항을 의미한다.] 이제껏 바꾸라고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바꿨다냐?" 라고 의아해했을 정도였다. 1274년 10월 신유일, 충렬왕이 서북면까지 가서 [[제국대장공주]]를 영접할 때 왕의 수행원들 중 이분희 등이 [[변발]]하지 않은 것을 보고 왕이 심하게 책망했다. 이렇듯 충렬왕 스스로 주변인들에게 몽골 풍속을 강요했으며, 11월 정축일, 왕과 공주 일행이 [[개성시|개경]]에 도착했을 때는 [[재상]]과 관원들이 국청사 문 앞까지 나가 왕 일행을 영접했는데 이때 호복을 입지 않은 대신들을 골라내 회초리로 때렸다고 한다. 문화적인 면으로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완성된 시대였으며,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간행되는 등 문화적으로 가치있는 서적들이 많이 나왔다. 유명한 고려 가요 <[[쌍화점#s-1]]>이 나온 시기도 충렬왕 치세로 알려져 있다. 충렬왕이 개인적으로 음악을 즐겼기에 당대 신하들에게 노래를 자주 작곡하게 했는데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서 충렬왕에 대해 "태자때는 학문에 충실하고 성격도 좋아서 잘 나가다가 막판에 참소하는 말이나 듣고 아들하고 싸우며 항락에 빠지는 등 완전히 타락한 왕"라는 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충렬왕으로서도 재위 초기에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힘썼지만 왕권이 강화된 이후로는 정사를 소홀히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나쁜 모습을 보인터라 왕으로서 무책임했던 군주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