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렬왕 (문단 편집) == 생애 == 조부 [[고종(고려)|고종]](제23대)이 붕어했을 때 [[태자]] [[원종(고려)|왕전]]은 [[몽골]]에 가 있었기 때문에 사왕(嗣王)이 돌아오기 전까지 태손으로서 [[대리청정]]을 했으며[* 원래 [[최의]]를 무너뜨리고('''무오정변''') 정권을 장악한 [[김준(고려)|김준]]은 원종의 동생이자 충렬왕의 숙부인 [[영종(고려)|안경공 왕창]]을 보위에 올리려 했다. 그러나 고종이 붕어하면서 원종의 왕위 계승과 몽골에서 원종이 귀환하기 전까지 태손 왕심이 대신 섭정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근왕파 신하들이 이를 명분으로 삼아 원종의 왕위 계승을 밀어붙인 탓에 김준은 이를 단념하게 되었다.] 1260년 아버지인 [[원종(고려)|원종]]이 즉위한 후, 1261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1271년 [[원나라]]에 갔으며, 세조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와 혼인했는데, 1274년 원종이 붕어하자 [[고려]]에 돌아와 즉위했다. 귀국할 때 몽골식으로 머리를 [[변발]]하고, 옷도 몽골식으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서 충렬왕의 모습을 보고 대성통곡하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부왕 원종 시절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한 데다가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부마|사위]]('''쿠르겐''')가 되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대칸의 간섭이 심해졌지만 사실 충렬왕도 '''세조구제''' 이후로 [[다루가치]]를 내보내고, 몽골군을 철수시키며 고려의 복식을 지키는 등 나름대로 나라의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힘썼다. 또한 대칸 겸 황제의 부마라는 위치는 상당한 것이라 아들 [[충선왕]]보다도 서열은 낮았지만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도 있었으며 원나라의 사신과 [[다루가치]]들도 충렬왕으로부터 술잔을 받을 때는 절을 하고 받아야 할 정도로 함부로 굴지 못했다. 쿠빌라이 칸은 원종 시절부터 '''[[일본을 공격한다]]'''(정일론)는 방침을 세우고, [[일본]] [[가마쿠라 막부]]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국 즉위하자마자 쿠빌라이 칸은 일본 원정을 실시하여 [[훈둔]]을 사령관으로 일본에 파견했고, 충렬왕 즉위 원년(1274년) 고려도 [[김방경]]을 사령관으로 한 일본 원정군을 파견했다. 고려군은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태풍]][* 일본에서는 '[[카미카제#s-1]]'(신풍)라고 부른다.] 때문에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1281년에도 재차 침공했지만 이 역시 태풍으로 실패했다.[* 일본 원정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항목을 참고할 것.] 일본 원정 준비 때문에 고려는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었으며, 전쟁 물자 징발로 백성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특히 [[제주도]]에 군마를 키우기 위한 목마장을 설치했는데 이 때문에 제주도에 [[말(동물)|말]]이 많아졌다고 한다. 1290년에는 원나라의 반란 세력이 고려를 공격하는 '''[[카다안의 침입]]'''이 일어났으며, 이 때 충렬왕의 태도는 가히 가관이었다.[* 자세한 부분은 [[카다안의 침입]] 항목 참조.] [[여몽전쟁|몽골의 침입]]은 끝났지만 수난이 많은 시기였고, 원나라 역시 속국 고려가 망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물자(공급)에 대한 지불은 확실히 했으며, 1291년 고려에 기근이 들자 무려 쌀 100,000석을 공짜로 주기도 했다. || '''고려 [[존호]]''' ||'''광문선덕태상왕[br](光文宣德太上王)'''|| || '''원 작위''' ||일수왕(逸壽王)|| || '''관저''' ||덕자궁(德慈宮)|| || '''태상왕 재위기간''' ||1298.01 ~ 1298.07 (7개월)|| 측근 세력들을 활용하여 왕권이 강화된 후에는 긴장감이 풀어졌는지 잔치와 [[매(조류)|매]]사냥을 즐겼다. 그 때 당시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무비'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충렬왕은 그녀를 대단히 아껴서 사냥하러 갈 때도 항상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다. 당연히 무비는 [[제국대장공주]]에게 질투 및 핍박의 대상이었고[* 사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이 민심을 돌보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평소에도 자주 다투었다.] 그러던 중 몽골에서 [[충선왕|세자 왕원]]과 [[계국대장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가 혼인을 마친 후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당시 세자였던 왕원은 [[원나라]]에서 급히 귀국했다. 평소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왕원은 [[고려]]로 돌아온 후 어머니의 죽음을 평소에 미움받던 무비 등이 꾸민 소행이라 보고, 무비와 그녀의 측근 40여 명을 죽여 버렸다.[* 하지만 이게 실질적으로는 부왕 충렬왕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과 다름없던 것이었다.] 마침 원나라 황실의 [[부마]]('''쿠르겐''')라는 끈도 떨어졌고, 수족마저 잘린 상황에서 충렬왕은 정치에 싫증을 느꼈는지 결국 선위를 결심하여[* 자의도 있었겠지만 압력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1298년 1월 [[세자]] 왕원에게 양위함으로써 한•몽 혼혈인이었던 왕원이 고려 제26대 국왕에 올랐다. 즉위와 함께 [[충선왕]]은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발표했는데 당장 그의 <즉위 교서>에만 봐도 잘 드러난다.[* 보통 왕의 <즉위 교서>는 형식적인 표현들이 대부분이었다.] 앞으로의 개혁 방안부터 시작해 구체적인 사항까지 세세히 열거했으며 그러한 개혁 정책 중 하나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격하된 기존 관제 복구였는데 이것은 충분히 반원 정책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한 조치였다.[* 이것 말고도 [[다루가치]]나 [[정동행성]] 등도 개혁 대상으로 다루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충선왕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과 왕실의 치정 문제로 부자 사이를 모략하는 무리가 생기는 등 여러 문제가 겹쳐 충선왕은 즉위한지 불과 8개월 만에 왕위를 빼앗긴 후[* 말 그대로 뺏긴 거다. 원나라의 사신이 다짜고짜 [[옥새]]를 빼앗았다.] 원나라로 끌려가고[*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가 10년이 지난 후 충렬왕이 죽고 나서야 고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1306년 충렬왕파가 충선왕파를 공격했는데, 충선왕의 복위를 막기 위해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 부부를 이혼시켜 충선왕의 권력을 대폭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원나라의 간섭하에 있었던 고려는 국왕이 꼭 원나라 황실의 여성과 결혼해야 정권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충선왕파의 빠른 대응과 1307년 충선왕파가 지지하던 [[무종(원)|무종 카이산 칸]][* [[원나라]] 무종 카이산은 계국대장공주의 사촌 남동생이었다. 원 무종은 세조 [[쿠빌라이]] 칸의 태자 [[칭김]]의 차남 [[다르마발라]]의 아들로, 장남 [[카말라]]의 딸인 계국대장공주의 사촌이었으며, 오히려 장남 카말라의 아들인 [[진종(원)|이순테무르]]와 경쟁 중이었다.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충선왕이 어린 시절 친했던 카이산을 지지한 것은 처가나 계국대장공주를 엿먹인 셈이었고, 이로 인해 훗날 이순테무르가 [[대칸]]이 되고 난 이후, 충선왕은 보복성 조치를 당하게 되었다.]이 즉위하자 충렬왕이 역으로 밀려 원나라 [[베이징|대도]]에 있던 경수사에 감금당했다가, 결국 충렬왕은 모든 실권을 뺏긴 채 고려로 환국했다. >불곡(不穀)한 자가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보우를 받아 참람히 왕위(王位)를 가지니, 지금까지 35년이었다. > >'''그간 나라는 어려움이 많았고 민은 제 일을 할 수 없었으며, 사악하고 비루한 자가 득세하고 충성스럽고 우수한 자는 사라지니, 모두 덕이 없었던 탓이라 마음 속엔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다만 하늘의 보우로 73년을 살았으니, 지금은 깊은 병에 걸려 낫지 않고 있다. 한번만이라도 [[충선왕|심양왕(瀋陽王)]]을 보고 싶어 편지를 보내 빨리 오게 했지만 대기(大期)[* 죽음의 때.]가 먼저 왔으니 얼굴을 맞대기를 기대할 순 없을듯 하다. > >아!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으니, 이치가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가 전하고 아들이 받으니, 옛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조종(祖宗)의 기업(基業)과 방국(邦國)의 기무(機務)는 모두 심양왕에게 맡기겠다. 너희 신료(臣僚)들은 오로지 너희의 임무를 다하고 왕이 오길 기다리다 내(予) 유훈(遺訓)을 잃어버리지 말고 전하라. >---- >《[[고려사]]》<충렬왕 세가> 중, 충렬왕의 유교(遺敎)[* 유교(遺敎)란,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에 남긴 명령이다.][* 나라가 엉망이었던 것과 가족 간 불화에 대한 회한을 포함해 책임감과 후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과의 정쟁에서 참패하고, 고려로 복귀했지만 충렬왕은 정치에 뜻을 잃고 숙창원에서 살며 사냥과 음주가무 등으로 소일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308년 7월 신효사에서 향년 73세에 승하했다.[* 고려의 역대 국왕 중 제일 장수했다. 재위기간은 제23대 [[고종(고려)|고종]]이 가장 길고, 제11대 [[문종(고려)|문종]]이 그 다음이다.] 충렬왕 사후 2년 뒤인 1310년 원나라 [[무종(원)|무종]]은 충렬왕에게 관작을 [[추증]]했다.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인량흥화봉경공신(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寅亮弘化奉慶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 - 부마(駙馬) - 고려국 충렬왕(高麗國 忠烈王)'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