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렬왕 (문단 편집) === 부인 [[제국대장공주]]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4OUSiGtTpQg)]}}} ||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는 유명한 세조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이자 태조 [[칭기즈 칸]]의 증손녀로, [[원나라]]에서 유일하게 직계 [[황금씨족]]임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이 아닌 이민족의 왕과 결혼한 공주였다. 그 때문에 원나라 내에서 충렬왕의 서열은 제후왕들 중 7위였다고 한다. 이는 자기 아들이자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보다도 높았다고 한다. 결혼 당시 제국대장공주는 16세의 꽃처녀였지만 충렬왕 왕심은 무려 39세의 아저씨였다. 충렬왕은 결혼 당시까지 애매한 처지였던[* 당시 기록을 보면 [[제국대장공주]]는 공주의 예우를 받았지만 그냥 '공주' 또는 '쿠툴룩켈미쉬 황녀'로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봉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에게 '원성전'에서 따온 '원성공주'[* 고려시대의 왕후, 왕비, 비는 자신의 거처인 '궁'이나 '원'에서 따온 '궁주'나 '원주'를 사용했고, 태후는 '전주'를 사용했다. 제국대장공주는 황녀의 지위 때문에 거처인 경성'궁'이 아닌 원성'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원제국의 황녀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원성전에서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주'가 아닌 '''공주'''로 책봉했다.]로 책봉하고, 원나라 황제를 설득해 '안평공주'의 책봉을 받아내 자신의 [[부마]]('''쿠르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거기다 황제가 바뀐 뒤 안평공주가 '제국대장공주'로 높여지면서 자신의 원 황실내 입지도 더 강해지게 되었다. [[제국대장공주]]는 탁월한 상업 감각이 있었다. 1274년 16세에 충렬왕과 결혼한 제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상인을 데려와서 '''[[고려]]의 [[인삼]], 종이, [[모시]] 따위를 원나라가 장악한 [[실크로드]]를 통해 머나먼 [[러시아]] 제공국과 [[아랍]]에까지 팔았다.''' 이때부터 고려의 물건이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한 지 8년 뒤, [[원나라]]가 [[남송]]을 정복하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완전히 집어삼킨 뒤론 인삼 교역에 날개가 달렸다. [[제국대장공주]]는 12세기초 [[정강의 변]] 이후, 남북조로 갈려진 중국을 재통일한 세계 제국 대몽골 울루스의 제5대 대칸이며, 대원제국을 세운 세조 [[쿠빌라이 칸]]의 황녀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고려인 관료들에게 [[몽고풍]]을 강요하거나 자기가 데려온 측근들을 우대함으로서 그들이 만행을 부리기도 했으며, 상업적인 능력으로 고려에 [[탕목읍]]을 두어 축재를 벌이는 등 부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공주의 성격은 엄하고 밝아 자신의 측근들도 잘못을 저지르면 용서하지 않았고, 책임감이 강해 고려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거나, 남편인 충렬왕에게 사냥을 멈추고, 정사에 힘을 쓸 것을 간하는 등 왕비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충렬왕이 사냥나간 곳에 따라 나가서 사냥감이 변변한 것이 없자 >'''"국정 돌보기도 바쁜 왕을, 왜 이런 [[거위]] 새끼 한 마리없는 곳까지 끌고 오냐??"''' 고 호종한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음악에 취미를 가져 내시 및 악공들과 풍류를 즐기는 충렬왕에게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거든요?" 고 해서 중지시키기도 했다. 아래 사례는 충렬왕 11년(1285년), 왕이 환관 김자정(金子廷)을 [[경주시|동경]]부사(東京副使)로 삼았을 때,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오간 대화이다. > 공주: 저는 [[경주시|동경]]이 대왕의 외가 고을이라 들었는데[* 충렬왕의 어머니 [[정순왕후 김씨(고려)|정순왕후]]는 김약선의 딸로 [[경주 김씨]]이다.] 맞나요? > 충렬왕: 그렇소. > 공주: 그러면 그런 중요한 고을 수령에 '''집안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을 임명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언제부터 [[고려]]에서 남반(南班)[* 고려시대 궁중의 숙직, 국왕의 시종·호종·경비, 왕명의 전달, 의장(儀仗)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내관직.] 출신이 그런 요직을 맡게 된 거죠? > 충렬왕: 원묘(元廟)[* 아버지 원종의 묘호를 높혀 부르는 표현이다.] 때부터요. > 공주: 대왕께선 역시 원왕(元王)의 아드님이시네요.[* 여기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기싸움이 보인다. 충렬왕은 아버지 [[원종(고려)|원종]]을 '''원묘'''(元廟), 즉 묘호로 불렀는데 공주는 그걸 '''원왕'''(元王)으로 격하해 불렀다. 천자의 묘호를 받은 선왕을 두고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보인다.] 이런 엄격한 성격에 투기가 매우 강해서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충선왕|아들]]이 태어난 것을 하례하는 연회에서 미리 설치된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그 연회에 마침 [[정화궁주]] 왕씨도 참석해 있었다. 정화궁주는 충렬왕이 태자이던 시절 처음 맞이한 아내로, 본래 충렬왕의 첫째 부인이었다가 [[제국대장공주]]의 등장으로 인해 무려 결혼 14년 만에 둘째 부인으로 밀려난 비운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때 충렬왕이 정화궁주 왕씨와 자신을 동렬에 놓자 매우 분노했고, 결국 정화궁주를 꿇게 하여 술을 받아냈다. 이에 충렬왕이 어이없어하며, 연회 중에 제국대장공주를 한 번 쳐다봤는데 그걸 "'''왜 쳐다봐요? 내가 [[정화궁주]]한테 막 대한다고 뭐, 지금 따지는 거임?'''" 하고는 "연회상이고 뭐고 갈아엎고, 나는 내 아들이 있는 데로 갈 거니까, 당장 가마를 가져오라."고 생떼를 부렸다. >동쪽 행랑의 평상에 공주의 자리를 마련했다. 식투르가 말하기를 "평상에 자리를 마련한 것은 공주님을 궁주와 같이 대접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주가 크게 노하여 바로 명하여 자리를 서쪽 행랑으로 옮겼는데 대개 서쪽 행랑엔 예부터 높은 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왕이 잔치를 그만두라 명하자, 공주는 전에서 내려와 크게 곡하며 말하길, "내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련다." 라고 하고 드디어 가마를 재촉하였다. >---- >《고려사》<제국대장공주 열전> 그런데 이건 자기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에 남편이 딴 여자를 끼고 와서는 자기와 동급으로 취급하면, 누구라도 화낼 만한 일이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이 있었지만 [[충선왕]] 이외에는 모두 일찍 죽었고, 호색해서 다른 여자들만 찾아대는 충렬왕의 행동이 제국대장공주에게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지, 그녀의 투기는 대단했다. 화풀이로 다른 후궁들과 그 자제들을 족치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특히 충렬왕의 전 정처였던 [[정화궁주]] 왕씨의 서열 관계를 가지고 따지거나, 정화궁주와 자신의 시종 수에 관해서 질투하기도 했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 23년(1297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23세의 [[충선왕]]은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부왕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무비]] 탓이라고 생각하여 주변 사람들을 잡아 죽이거나 귀양보냈고, 당시 63세이던 충렬왕은 이에 환멸을 느껴 잠시 왕위를 양위했으나 곧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