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춘추시대 (문단 편집) ==== 정나라의 반기 ==== 정나라의 시조는 [[주선왕]]의 동생[* 사기 십이제후연표에 의하면 동모제(同母弟) 즉 친동생이고 정세가에 의하면 서제(庶弟) 즉 이복동생이다.]인 정백 우(鄭伯 友) 즉 [[정환공]]이다. 주유왕 당시 정치가 혼란하자 정환공은 자신의 나라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주나라 태사의 조언을 따라 괵虢과 회鄶 사이의 땅으로 옮기기로 한다. 왕에게 허락을 받고 나라를 옮기니 그곳이 신정(新鄭)이다. 기원전 771년, 주나라의 사도 직책을 맡고있던 정환공은 견융의 침입 때 [[주유왕]]을 지키다 죽고 태자인 굴돌이 뒤를 이으니 그가 [[정무공]]이다. 정무공은 동괵과 회鄶를 합병한다. 기원전 743년, 정무공이 죽고 장남 오생(寤生)이 뒤를 이으니 그가 [[정장공]]이다. 무공과 장공은 주나라의 경사를 맡았는데 정나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한 [[주평왕]]은 기원전 720년, 정장공의 업무를 괵공과 나누어 맡도록 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공이 왕을 원망하자 평왕은 그런 일 없다면서 정나라와 인질을 교환한다. 본래 천자와 제후가 인질을 교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주나라의 권위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이다. 같은 해 평왕이 죽고 태자는 이미 죽었기에 평왕의 장손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주환왕]]이다. 환왕은 즉위하고 괵공에게 정사를 맡기려 했다. 이에 정장공은 주나라 왕실 땅의 곡식을 무단으로 빼앗아감으로서 보복한다. 기원전 717년, 정장공이 입조하나 추수한 곡식을 약탈한 것에 분노한 환왕은 그를 예로써 맞이하지 않았고 장공은 분노하여 돌아간다. 주나라와 정나라의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었고 환왕은 마침내 정장공을 경사 직분을 빼았자 장공은 더이상 천자에게 조근을 가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707년 가을, 왕이 직접 제후[* 좌전에 의하면 채蔡, 위衛, 진陳이 천자 측으로 참전했다.]를 거느리고 정나라 정벌에 나서 수갈[* 정나라의 수도인 신정 남쪽에 있다.]에서 맞붙었지만 대패하고 만다. 심지어 환왕은 전투 중 어깨에 화살을 맞았을 정도로 치욕스런 패배였고 이 전투로 주나라가 이빨빠진 호랑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천자와의 대립 말고도 정장공은 제, 노, 송, 위 등 중원 국가들의 일에 개입하며 훗날 소패(小覇)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그러나 기원전 701년, 춘추 초기를 주름잡은 간웅 정장공이 사망하고 정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게 된다. 장공 사후 기원전 701년부터 기원전 680년까지 장공의 네 아들이 군주의 자리를 다투는 혼란기가 지속되었고 기원전 680년, 정여공이 공자 영을 죽이고 복위에 성공하면서 마침내 분쟁이 마무리되지만[* 정여공과 공자 영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인 정소공과 공자 미는 이미 죽은 상황이었다.] 이미 제齊와 초楚의 국력은 정나라보다 훨씬 강력한 상황이었다. 정나라의 위치는 강성할 때는 사방으로 치고나가기 좋았지만 약할 때는 사방의 강국들로부터 침략을 받는 위치였다. 약소국으로 전락한 정나라는 춘추시대 내내 진晉과 초楚의 전쟁터가 되었고 진이 침략하면 진에 붙고 초가 보복하러 오면 초에 붙는 박쥐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